세월과 낭만을 새기다, 작은연필가게 흑심
INTRO
새까만 심의 끝이 뭉툭해질 때 마다
나의 불편한 낭만이 적힌다.
시들지 않는 기억과 찰나가 고이는 곳.
W. 유수연
같은 공간을 방문하더라도 사람마다 그 공간에 대해 다르게 추억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공간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장소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했다. ‘에드워드 렐프’ (Edward Relph)는 ‘장소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물리적 환경’(장소의 외관), ‘활동’(장소의 인적 문화적 요소), 그리고 ‘의미’(장소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상징적 측면)로 규정한다. 덧붙여, 이 세 요소를 바탕으로 요소들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장소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에디터들은 이러한 맥락 하에, ‘작은연필가게 흑심’ 또한 여러 요소들이 함께 작용해 장소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가게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 제공되는 서비스, 그리고 공간 이용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들이 작은 공간을 무한한 기억으로 채운다.
연희동에 위치한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빈티지 연필과 각종 문구류를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을 걸어 올라와 두꺼운 철문을 열면, 푸릇한 식물들이 연이어 놓인 좁고 긴 복도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마치 평범한 가정집 같기도 한 복도는 인센스 냄새와 커다란 연필 모형을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계단에 연속적으로 붙은 몽당 연필 그림과, 긴 복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센스 향기는 ‘흑심’ 에 대한 방문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복도를 지나쳐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비로소 수집가의 방이 펼쳐진다.
가게 내부에는 출입구와 가까운 쪽부터 연필 진열대가 이어지고, 안쪽에는 계산대와 문구를 각인하는 곳이 위치해 있다. 가장 안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져, 책에 대한 기대평을 적을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기대평이 당첨되면 그 책을 선물받을 수 있었기에, 책에 관심이 있다면 참여해도 좋은 이벤트였다.
연필과 소품이 가득 찬 공간은 크기에 비해 사람이 많아서인지,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이며 진열대 속 연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새 진열대를 지나 안쪽 계산대와 책상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는 잠시 멈춰 연필에 각인할 문구나, 연필에 대한 생각, 기대평을 적는다. 이 자연스러운 동선 덕에 스며들 듯 연필 더미 속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전반적인 공간은 연필의 주재료인 나무로 만들어진 목재 가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벽면은 짙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어 차분하고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명은 레일형 등기구로 진열대를 비추고, 수납장과 계산대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진 부분만 팬던트 조명을 이용해 차이를 두고 있다. 바닥은 학창 시절 학교의 복도를 연상시켜 연필을 사용하는 공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수납장과 벽면 사이 구석진 자리에 놓인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깔린 러그와 함께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창문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빛은 비 오는 날이었음에도 왠지 모를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복작거리는 가게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본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느린 공간.
연필을 구경하다 보면, 거슬리지 않는 적당한 볼륨의 재즈 선율이 귀를 타고 들어온다. 그 음악을 따라 가게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LP판이 돌아가는 턴테이블이 보인다. 연필과 턴테이블은 사용하기 편리한 현대의 물건들에게 밀려있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입구의 오른편엔 과거에 사용된 필기구를 전시하고 있는 보관함이 있다. 포장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색이 바랬지만, 안에 전시되어 있는 필기구들은 지금 당장 사용해도 괜찮을 것처럼 튼튼해 보였다.
과거 국민 학교 시절에나 사용했을 듯한 우리나라의 크레파스와 연필세트부터 오래전 외국에서 제작된 연필까지 다양한 연필이 있었다. 그 중 특히 눈에 띈 건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아주 얇은 연필과 회오리 모양의 연필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디자인의 연필을 어떻게 사용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연필들이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연필을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나무의 결을 살려 투박하게 깎은 연필, 네모난 심을 가진 연필,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정도로 아주 얇은 연필, 나무의 향이 진하게 풍기는 연필, 노랑, 빨강, 초록의 다채로운 색깔의 연필 등 전형적인 연필에서 벗어난 재미난 연필들을 볼 수 있다.
한편,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색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연필을 구매할 때 주문표를 작성하여 연필과 같이 카운터에 가져가면 사장님께서 그 자리에서 손수 연필에 글귀를 새겨 주신다. 주문 후 5분정도 여유롭게 공간을 즐기고 있다 보면 세상에서 하나 뿐인 연필을 받을 수 있다.
각 연필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소중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연필 세트를 만들 수 있는 패키지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다. 연필을 구경하다 소중한 누군가가 떠올랐다면,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짧아져 사용하지 못하는 몽당 연필을 가지고 오면 특별 제작한 초록색 새 연필로 교환해 주신다. 구매한 연필이 7cm보다 더 짧아진다면 이 곳에 다시 한 번 방문해도 좋겠다.
공간에 머무는 동안 진하고 두툼한 연필을 보며 옛 입시 시절을 추억하는 작가, 무늬가 벗겨진 오래된 연필을 만지고 써 보며 눈에 담는 청년, 몽당연필을 손에 쥐어주며 어린 자녀에게 물건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이 공간에서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은 몽당연필이 되어버린 자신의 연필을 생각하며 열정에 취했던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고,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는 자신의 연필이 어서 몽당연필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곤 더 멋진 새로운 연필을 쥐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다양한 세대가 한데 모여 추억하고 기대하며 연필의 뭉뚝함에 위로와 격려를 받는 공간이자, 연필을 매개로 번지는 따뜻함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에디터의 시선
지현
연필을 만지고 써보며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필기를 하고 나면 새까매졌던 손과, 금세 뭉툭해지는 연필심 끄트머리에 약간의 짜증을 담아 연필깎이를 돌리던 기억이. 이제 연필은 “빈티지”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희소해졌다. 특별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디지털의 편리함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앞으로의 세대는 내가 가진 추억과 경험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연필을 모으고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은 소중하다.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사라지는 아날로그를, 그 낭만을 깊게 들이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민재
가게에 처음 들어섰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놀랐다. 연인, 친구, 그리고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아이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연필들을 구경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나도 몇 가지 손에 잡히는 연필들을 써 보았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생산된 연필에는 금속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대체 재료로 플라스틱이나 하드보드지를 이용했다는 빈티지 연필, 글을 빠르고 간결하게 써야해 일반 HB 연필보다 쉽게 뭉개지지 않는 속기용 연필 등의 연필을 보았다. 그러면서 생산 시기, 상황, 목적에 따라 다른 재료들을 품으며 향기를 내는 연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세상 수백가지 연필들 중에 나만의 연필을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면 연필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연필을 구매하고 다시 둘러보니 그 몸 에 맞는 깍지를 선물해주고 싶고, 지우개 짝꿍을 만들어주고 싶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 손 가득 지인들의 선물까지 들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단순 구매에 그치지 않고 발견과 고뇌, 획득의 감정과 소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샘
나는 미대 입시를 했기 때문에 연필은 나에게 친숙한 존재였다. 6H부터 6B까지, 소묘를 했던 나는 매일 50자루 이상의 연필을 깎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치열한 입시가 끝난 이후 연필 드로잉과 멀어지게 되었고, 그런 나에게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처음엔 애증의 공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눈에 익숙한 연필들과 함께 진열된 개성 넘치는 새로운 연필들, 지우개, 연필깎이들은 나에게 그리움과 새로움을 안겨주었다.
각 연필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들을 읽다 보면 그 연필을 선물해 주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연필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담다 보니 어느새 연필을 한가득 잡고 있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연필 한 자루를 소개하고 싶다.
Golden Gokaku Pencil ‘합격기원 학업성취’ 문구가 새겨져 있는 황금빛 오각형 연필이다. 일본에서 합격은 合格(ごうかく고오카쿠), 오각형은 五角(ごかく고카쿠)로 두 단어의 유사한 발음때문에 오각형은 합격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올해 고3인 나의 남동생이 생각나 선물로 하나 사게 되었다. 원하는 대학 합격해!
채원
원래는 구매할 생각 없이 구경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게를 구경하다보니 마음에 쏙 들어버린 연필이 있었다. 수능샤프를 아직까지도 쓰고 있을 정도로 필기구에 큰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홀딱 반하게 만들어버린 그런 연필이었다.
Caran d’Ache Swiss Wood 갈색 나무 바디를 가진 평범해 보이는 연필이지만, 이 연필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바로 너도밤나무 바디에서 나는 커피 같기도, 초콜렛 같기도 한 오묘한 향이다. 다양한 향수를 구매하거나 직접 공방에 가서 디퓨저를 만들 정도로 향기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연필에서도 이렇게 향이 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이 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구매를 하고 말았다.
혜원
BLACKWING PEARL. PINK 연필에 각인 문구를 새길 수 있는 곳이 있어 누구에게 어떤 문구가 적힌 연필을 선물할지 곰곰이 생각하다, 요근래 어머니가 독서를 하실 때 마다 몽당 연필로 메모를 하시던 것이 기억났다. <몽당연필을 가져오면 새 연필로 바꿔드립니다> 라는 ‘흑심’의 표어를 대신 실현해 보고자 어머니께 연필을 선물하기로 맘먹었다. 연필을 고르고, 문구를 적어 계산대에 서는 동안 천천히 머릿속 가득 그 사람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 한편엔 ‘연필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자유롭게 남길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Q. 연필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샘 : “사용할 때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심이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주기적으로 깎아야 한다. 연필을 사용하면 누군가를 소중히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민재 : “얼마든지 지워내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는 용기. 마음의 시작.”
지현 : “백스페이스 키로 말끔하고 신속하게 지워낼 수 없는 진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
채원 : “쉴 새 없이 쓸 수 있는 필기구와는 달리, 열심히 그리거나 쓰다가 심이 닳으면 깎는 과정을 통해 그 시간 동안만큼은 생각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것.”
혜원 : “쓰는 행위 자체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손이 연필보다 키보드에 닿는 날이 현저히 많은 날들이지만, 연필을 한 번 잡으면 빈 종이를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오래 잡은 연필이 자국과 굳은살이 되어 손에 남으면 이를 만지작거리며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생각하고 여운을 조금 더 길게 즐길 수도 있다.”
editor_ 권혜원, 김민재, 김지현, 이채원, 유샘
designer_김민재
세월과 낭만을 새기다, 작은연필가게 흑심
INTRO
새까만 심의 끝이 뭉툭해질 때 마다
나의 불편한 낭만이 적힌다.
시들지 않는 기억과 찰나가 고이는 곳.
W. 유수연
같은 공간을 방문하더라도 사람마다 그 공간에 대해 다르게 추억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공간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장소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했다. ‘에드워드 렐프’ (Edward Relph)는 ‘장소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물리적 환경’(장소의 외관), ‘활동’(장소의 인적 문화적 요소), 그리고 ‘의미’(장소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상징적 측면)로 규정한다. 덧붙여, 이 세 요소를 바탕으로 요소들과 사람 간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장소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에디터들은 이러한 맥락 하에, ‘작은연필가게 흑심’ 또한 여러 요소들이 함께 작용해 장소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가게를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 제공되는 서비스, 그리고 공간 이용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들이 작은 공간을 무한한 기억으로 채운다.
연희동에 위치한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빈티지 연필과 각종 문구류를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을 걸어 올라와 두꺼운 철문을 열면, 푸릇한 식물들이 연이어 놓인 좁고 긴 복도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마치 평범한 가정집 같기도 한 복도는 인센스 냄새와 커다란 연필 모형을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계단에 연속적으로 붙은 몽당 연필 그림과, 긴 복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인센스 향기는 ‘흑심’ 에 대한 방문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복도를 지나쳐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비로소 수집가의 방이 펼쳐진다.
가게 내부에는 출입구와 가까운 쪽부터 연필 진열대가 이어지고, 안쪽에는 계산대와 문구를 각인하는 곳이 위치해 있다. 가장 안쪽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져, 책에 대한 기대평을 적을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기대평이 당첨되면 그 책을 선물받을 수 있었기에, 책에 관심이 있다면 참여해도 좋은 이벤트였다.
연필과 소품이 가득 찬 공간은 크기에 비해 사람이 많아서인지, 한 걸음씩 천천히 움직이며 진열대 속 연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새 진열대를 지나 안쪽 계산대와 책상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곳에서는 잠시 멈춰 연필에 각인할 문구나, 연필에 대한 생각, 기대평을 적는다. 이 자연스러운 동선 덕에 스며들 듯 연필 더미 속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전반적인 공간은 연필의 주재료인 나무로 만들어진 목재 가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벽면은 짙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어 차분하고 무게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명은 레일형 등기구로 진열대를 비추고, 수납장과 계산대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진 부분만 팬던트 조명을 이용해 차이를 두고 있다. 바닥은 학창 시절 학교의 복도를 연상시켜 연필을 사용하는 공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수납장과 벽면 사이 구석진 자리에 놓인 책상과 의자는 바닥에 깔린 러그와 함께 더욱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창문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빛은 비 오는 날이었음에도 왠지 모를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복작거리는 가게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본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느린 공간.
연필을 구경하다 보면, 거슬리지 않는 적당한 볼륨의 재즈 선율이 귀를 타고 들어온다. 그 음악을 따라 가게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LP판이 돌아가는 턴테이블이 보인다. 연필과 턴테이블은 사용하기 편리한 현대의 물건들에게 밀려있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입구의 오른편엔 과거에 사용된 필기구를 전시하고 있는 보관함이 있다. 포장은 세월을 이기지 못해 색이 바랬지만, 안에 전시되어 있는 필기구들은 지금 당장 사용해도 괜찮을 것처럼 튼튼해 보였다.
과거 국민 학교 시절에나 사용했을 듯한 우리나라의 크레파스와 연필세트부터 오래전 외국에서 제작된 연필까지 다양한 연필이 있었다. 그 중 특히 눈에 띈 건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아주 얇은 연필과 회오리 모양의 연필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디자인의 연필을 어떻게 사용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연필들이었다.
다양한 디자인의 연필을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나무의 결을 살려 투박하게 깎은 연필, 네모난 심을 가진 연필,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정도로 아주 얇은 연필, 나무의 향이 진하게 풍기는 연필, 노랑, 빨강, 초록의 다채로운 색깔의 연필 등 전형적인 연필에서 벗어난 재미난 연필들을 볼 수 있다.
한편,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색다른 서비스를 제공한다. 연필을 구매할 때 주문표를 작성하여 연필과 같이 카운터에 가져가면 사장님께서 그 자리에서 손수 연필에 글귀를 새겨 주신다. 주문 후 5분정도 여유롭게 공간을 즐기고 있다 보면 세상에서 하나 뿐인 연필을 받을 수 있다.
각 연필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소중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연필 세트를 만들 수 있는 패키지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다. 연필을 구경하다 소중한 누군가가 떠올랐다면,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짧아져 사용하지 못하는 몽당 연필을 가지고 오면 특별 제작한 초록색 새 연필로 교환해 주신다. 구매한 연필이 7cm보다 더 짧아진다면 이 곳에 다시 한 번 방문해도 좋겠다.
공간에 머무는 동안 진하고 두툼한 연필을 보며 옛 입시 시절을 추억하는 작가, 무늬가 벗겨진 오래된 연필을 만지고 써 보며 눈에 담는 청년, 몽당연필을 손에 쥐어주며 어린 자녀에게 물건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이 공간에서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은 몽당연필이 되어버린 자신의 연필을 생각하며 열정에 취했던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고,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는 자신의 연필이 어서 몽당연필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곤 더 멋진 새로운 연필을 쥐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다양한 세대가 한데 모여 추억하고 기대하며 연필의 뭉뚝함에 위로와 격려를 받는 공간이자, 연필을 매개로 번지는 따뜻함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에디터의 시선
지현
연필을 만지고 써보며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필기를 하고 나면 새까매졌던 손과, 금세 뭉툭해지는 연필심 끄트머리에 약간의 짜증을 담아 연필깎이를 돌리던 기억이. 이제 연필은 “빈티지”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희소해졌다. 특별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디지털의 편리함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앞으로의 세대는 내가 가진 추억과 경험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연필을 모으고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은 소중하다.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사라지는 아날로그를, 그 낭만을 깊게 들이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민재
가게에 처음 들어섰을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놀랐다. 연인, 친구, 그리고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아이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연필들을 구경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나도 몇 가지 손에 잡히는 연필들을 써 보았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생산된 연필에는 금속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대체 재료로 플라스틱이나 하드보드지를 이용했다는 빈티지 연필, 글을 빠르고 간결하게 써야해 일반 HB 연필보다 쉽게 뭉개지지 않는 속기용 연필 등의 연필을 보았다. 그러면서 생산 시기, 상황, 목적에 따라 다른 재료들을 품으며 향기를 내는 연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세상 수백가지 연필들 중에 나만의 연필을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면 연필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진다. 연필을 구매하고 다시 둘러보니 그 몸 에 맞는 깍지를 선물해주고 싶고, 지우개 짝꿍을 만들어주고 싶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 손 가득 지인들의 선물까지 들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단순 구매에 그치지 않고 발견과 고뇌, 획득의 감정과 소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샘
나는 미대 입시를 했기 때문에 연필은 나에게 친숙한 존재였다. 6H부터 6B까지, 소묘를 했던 나는 매일 50자루 이상의 연필을 깎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치열한 입시가 끝난 이후 연필 드로잉과 멀어지게 되었고, 그런 나에게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처음엔 애증의 공간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눈에 익숙한 연필들과 함께 진열된 개성 넘치는 새로운 연필들, 지우개, 연필깎이들은 나에게 그리움과 새로움을 안겨주었다.
각 연필들이 가지고 있는 사연들을 읽다 보면 그 연필을 선물해 주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연필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담다 보니 어느새 연필을 한가득 잡고 있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연필 한 자루를 소개하고 싶다.
Golden Gokaku Pencil ‘합격기원 학업성취’ 문구가 새겨져 있는 황금빛 오각형 연필이다. 일본에서 합격은 合格(ごうかく고오카쿠), 오각형은 五角(ごかく고카쿠)로 두 단어의 유사한 발음때문에 오각형은 합격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올해 고3인 나의 남동생이 생각나 선물로 하나 사게 되었다. 원하는 대학 합격해!
채원
원래는 구매할 생각 없이 구경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게를 구경하다보니 마음에 쏙 들어버린 연필이 있었다. 수능샤프를 아직까지도 쓰고 있을 정도로 필기구에 큰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홀딱 반하게 만들어버린 그런 연필이었다.
Caran d’Ache Swiss Wood 갈색 나무 바디를 가진 평범해 보이는 연필이지만, 이 연필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바로 너도밤나무 바디에서 나는 커피 같기도, 초콜렛 같기도 한 오묘한 향이다. 다양한 향수를 구매하거나 직접 공방에 가서 디퓨저를 만들 정도로 향기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연필에서도 이렇게 향이 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이 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구매를 하고 말았다.
혜원
BLACKWING PEARL. PINK 연필에 각인 문구를 새길 수 있는 곳이 있어 누구에게 어떤 문구가 적힌 연필을 선물할지 곰곰이 생각하다, 요근래 어머니가 독서를 하실 때 마다 몽당 연필로 메모를 하시던 것이 기억났다. <몽당연필을 가져오면 새 연필로 바꿔드립니다> 라는 ‘흑심’의 표어를 대신 실현해 보고자 어머니께 연필을 선물하기로 맘먹었다. 연필을 고르고, 문구를 적어 계산대에 서는 동안 천천히 머릿속 가득 그 사람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 한편엔 ‘연필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자유롭게 남길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Q. 연필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샘 : “사용할 때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심이 부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주기적으로 깎아야 한다. 연필을 사용하면 누군가를 소중히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민재 : “얼마든지 지워내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는 용기. 마음의 시작.”
지현 : “백스페이스 키로 말끔하고 신속하게 지워낼 수 없는 진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
채원 : “쉴 새 없이 쓸 수 있는 필기구와는 달리, 열심히 그리거나 쓰다가 심이 닳으면 깎는 과정을 통해 그 시간 동안만큼은 생각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는 것.”
혜원 : “쓰는 행위 자체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손이 연필보다 키보드에 닿는 날이 현저히 많은 날들이지만, 연필을 한 번 잡으면 빈 종이를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오래 잡은 연필이 자국과 굳은살이 되어 손에 남으면 이를 만지작거리며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생각하고 여운을 조금 더 길게 즐길 수도 있다.”
editor_ 권혜원, 김민재, 김지현, 이채원, 유샘
designer_김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