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어두운 곳에서 밝은 부분이 잘 보이는 것과 달리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리고서야 깨닫는 소중한 것들.
W. 한다현
퀴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
"너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 최근 박상영 작가의 퀴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예고편을 공개했다.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향한 다양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질문은, 단순히 관계의 의미를 넘어서 서로를 혹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만든다. 예술에서 '퀴어'라는 주제는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의 표현을 넘어, 배제되거나 소외된 목소리들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힘을 지닌다. 이러한 주제가 최근 예술과 미디어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며 우리의 일상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퀴어'라는 주제를 다루는 예술은 특정 장르나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적 언어로 표현되며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다. 대중에게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여,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예술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퀴어 문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시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참여하신 이강승 작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강승 작가님의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작품들은 퀴어 역사를 기반으로 동성애와 돌봄의 개념을 함께 표현했다. 시인 파멜라 스니드가 1980~1990년대 에이즈 유행으로 사망한 퀴어 친구들과, 그들을 보살폈던 사람들을 누가 돌보게 될지 질문하는 시의 일부를 차용하여 제목이 지어졌다. 전시는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기준에 개입하여, 사회에서 추방되고 잊혀진 역사를 탐구한다. 더불어 공동체에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의해 나눠진 것들의 교차점을 연결했다. 작가는 서로를 돌보아주던 퀴어 공동체 사람들에게서 수집한 아카이브 자료들과 퀴어 예술가들의 활동을 한 공간 안에 담아냈다. <The Heart of A Hand>작업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 안무가 고추산을 기리는 영상으로, 필리핀계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안무가인 조슈아 세라핀과 협업하여 고추산의 인생과 고통을 강렬한 음악과 안무로 표현했다.
“작업을 통해서 국가와 세대를 넘어선 연결들을 마주하고 고민하고 연대함으로써 조금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대의 시작이 ‘돌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전시가 퀴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강승
예은: 불타다 남은 종이 위에 편지와 얼굴이 번진 사진들을 연필로 그려 넣은 작품에서, 섬세한 표현 방식으로 사람들의 지워져가는 삶을 기억하자는 메세지가 잘 와닿았다. 다양한 이들이 남긴 오브제와 파편들, 삼베에 금사로 수어를 나타낸 그의 작품들에서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공중에 매달린 나뭇가지와 돌은 천천히 움직이며 역사 속을 표류하는 느낌을 주었다. 영상 작품들은 소리와 공간이 주는 압도감 때문에 회화나 입체 작품들보다 기억에 많이 남았다.
불합리함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이 심어주는 용기: 웹툰 <정년이>
사진 출처: 네이버 웹툰 <정년이>
웹툰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전통 판소리의 세계에 발을 들인 여성 소리꾼 '정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년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받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성장한다. 정년이의 이야기는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입체적이고 솔직한 여성국극단원들의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함께 분노하게 하기도 하고, 함께 눈물짓게 만들기도 한다. 웹툰을 마무리하는 작가의 후기 중 “여성 국극은 사랑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였다. 배우들의 무대를 향한 사랑. 한 숙소에서 함께 지냈던 배우들 간의 사랑. 쇠퇴하는 여성국극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의 사랑. 정년이를 기획하는 과정은 이 마음을 헤아려보는 과정이었다.”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정년이>는 퀴어 정체성뿐만 아니라 성별, 계급, 전통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틀 안에서 억압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포용의 메시지를 전한다. 정년이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넘어서 성장하는 모습은, 곧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차별의 시선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며, 맞서 나가야 할 과제이기에.
한나: 작품 중 “청의공주는 왜 왕비가 됩니까?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으니까?”라는 질문에 “혼인을 해야지. 관객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라고 답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그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로 하여금 틀과 관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관점을 인지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라는 주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큰 울림이 아닐까?
예은: <정년이>는 페미니즘과 퀴어 서사를 잘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정년이가 드라마화 되면서 원작에서 비중이 꽤 컸던 ‘부용이’ 캐릭터가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가 퀴어 서사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최근 드라마, 영화 등 영상 매체에서 퀴어 서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사회가 변화하려면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채현: <정년이>는 여성 서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준 작품이다. 무대를 향한 열정, 진취적인 삶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정년’과 ‘영서’의 갈등을 통해 사회적 여성성이나 남성에 의해 재단되는 욕망이 아닌 여성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부용’이 남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정년’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모습으로 다양한 여성 서사를 그려내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의 레즈비언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부용’을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다채로운 퀴어 캐릭터를 보여주었다는 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가 나인채로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사진 출처 : CGV 홈페이지
마지막으로,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집 중 단편 「재희」를 각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성별부터 사랑법까지 전부 다른 두 친구가 만나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스무 살, 대학에서 처음 만난 재희와 흥수는 서로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아웃사이더’이자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소수자’라는 것을 직감한다. 재희는 개성 있고 아름다운 헤테로 여성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유학파 출신인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흥수는 어렸을 때부터 인지하고 있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하는 인물이다. 세상의 편견은 각기 다른 이유로 비주류인 그들을 결속시켰다. 색안경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상처받는 재희는 흥수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남 몰래 연애하며 커밍아웃 하지 못하는 흥수도 재희 앞에서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특히 흥수는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며 자신조차 스스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 흥수에게 재희는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한다. 너는 너인 채로도 괜찮으며, 그렇기에 너의 성 정체성도 약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재희의 응원에 힘입어 흥수가 ‘나다움’을 찾아 성장하는 모습은, 같은 고충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한나: 주인공들이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은 상처를 받고, 타인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는 연속적인 여정이었으나, 결국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은: “내가 나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려준 내 20대의 외장하드. 잘 가라 재희야.”
성별과 성적 지향성이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하고 멀어지고 다시 사랑하는 재희와 흥수의 모습에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차별과 아픔 속에서 서로가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던 재희와 흥수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서로를 보듬어주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채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퀴어 영화다. 퀴어 당사자인 흥수와 그의 친구 재희가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다움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은, 같은 고충을 겪는 이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논퀴어가 퀴어 당사자와 연대하여 누구든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받고,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강승 작가의 전시, 웹툰 <정년이>, 그리고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통해 우리는 다채로운 정체성과 그에 따른 경험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퀴어적 요소는 예술을 통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궁극적으로, 사랑과 정체성은 자유롭게 표현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의미를 가진다. 서로의 다양성을 차별 없이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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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 이예은
editor. 강채현, 김한나
artwork. 이예은
INTRO
어두운 곳에서 밝은 부분이 잘 보이는 것과 달리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리고서야 깨닫는 소중한 것들.
W. 한다현
퀴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
"너는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 최근 박상영 작가의 퀴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예고편을 공개했다.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향한 다양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질문은, 단순히 관계의 의미를 넘어서 서로를 혹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만든다. 예술에서 '퀴어'라는 주제는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의 표현을 넘어, 배제되거나 소외된 목소리들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힘을 지닌다. 이러한 주제가 최근 예술과 미디어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며 우리의 일상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퀴어'라는 주제를 다루는 예술은 특정 장르나 형식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적 언어로 표현되며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다. 대중에게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여,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예술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퀴어 문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시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먼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었던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참여하신 이강승 작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강승 작가님의 <누가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보살피게 될까> 작품들은 퀴어 역사를 기반으로 동성애와 돌봄의 개념을 함께 표현했다. 시인 파멜라 스니드가 1980~1990년대 에이즈 유행으로 사망한 퀴어 친구들과, 그들을 보살폈던 사람들을 누가 돌보게 될지 질문하는 시의 일부를 차용하여 제목이 지어졌다. 전시는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기준에 개입하여, 사회에서 추방되고 잊혀진 역사를 탐구한다. 더불어 공동체에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의해 나눠진 것들의 교차점을 연결했다. 작가는 서로를 돌보아주던 퀴어 공동체 사람들에게서 수집한 아카이브 자료들과 퀴어 예술가들의 활동을 한 공간 안에 담아냈다. <The Heart of A Hand>작업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 안무가 고추산을 기리는 영상으로, 필리핀계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안무가인 조슈아 세라핀과 협업하여 고추산의 인생과 고통을 강렬한 음악과 안무로 표현했다.
“작업을 통해서 국가와 세대를 넘어선 연결들을 마주하고 고민하고 연대함으로써 조금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대의 시작이 ‘돌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전시가 퀴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강승
예은: 불타다 남은 종이 위에 편지와 얼굴이 번진 사진들을 연필로 그려 넣은 작품에서, 섬세한 표현 방식으로 사람들의 지워져가는 삶을 기억하자는 메세지가 잘 와닿았다. 다양한 이들이 남긴 오브제와 파편들, 삼베에 금사로 수어를 나타낸 그의 작품들에서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공중에 매달린 나뭇가지와 돌은 천천히 움직이며 역사 속을 표류하는 느낌을 주었다. 영상 작품들은 소리와 공간이 주는 압도감 때문에 회화나 입체 작품들보다 기억에 많이 남았다.
불합리함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이 심어주는 용기: 웹툰 <정년이>
사진 출처: 네이버 웹툰 <정년이>
웹툰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전통 판소리의 세계에 발을 들인 여성 소리꾼 '정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년이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받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성장한다. 정년이의 이야기는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입체적이고 솔직한 여성국극단원들의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함께 분노하게 하기도 하고, 함께 눈물짓게 만들기도 한다. 웹툰을 마무리하는 작가의 후기 중 “여성 국극은 사랑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였다. 배우들의 무대를 향한 사랑. 한 숙소에서 함께 지냈던 배우들 간의 사랑. 쇠퇴하는 여성국극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의 사랑. 정년이를 기획하는 과정은 이 마음을 헤아려보는 과정이었다.”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정년이>는 퀴어 정체성뿐만 아니라 성별, 계급, 전통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틀 안에서 억압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포용의 메시지를 전한다. 정년이 자신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넘어서 성장하는 모습은, 곧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차별의 시선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며, 맞서 나가야 할 과제이기에.
한나: 작품 중 “청의공주는 왜 왕비가 됩니까?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으니까?”라는 질문에 “혼인을 해야지. 관객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라고 답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그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로 하여금 틀과 관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관점을 인지하게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라는 주체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큰 울림이 아닐까?
예은: <정년이>는 페미니즘과 퀴어 서사를 잘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정년이가 드라마화 되면서 원작에서 비중이 꽤 컸던 ‘부용이’ 캐릭터가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가 퀴어 서사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최근 드라마, 영화 등 영상 매체에서 퀴어 서사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사회가 변화하려면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채현: <정년이>는 여성 서사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준 작품이다. 무대를 향한 열정, 진취적인 삶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정년’과 ‘영서’의 갈등을 통해 사회적 여성성이나 남성에 의해 재단되는 욕망이 아닌 여성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욕망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부용’이 남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정년’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모습으로 다양한 여성 서사를 그려내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대의 레즈비언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부용’을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다채로운 퀴어 캐릭터를 보여주었다는 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가 나인채로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사진 출처 : CGV 홈페이지
마지막으로,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집 중 단편 「재희」를 각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성별부터 사랑법까지 전부 다른 두 친구가 만나 ‘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스무 살, 대학에서 처음 만난 재희와 흥수는 서로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아웃사이더’이자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소수자’라는 것을 직감한다. 재희는 개성 있고 아름다운 헤테로 여성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유학파 출신인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흥수는 어렸을 때부터 인지하고 있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하는 인물이다. 세상의 편견은 각기 다른 이유로 비주류인 그들을 결속시켰다. 색안경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상처받는 재희는 흥수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남 몰래 연애하며 커밍아웃 하지 못하는 흥수도 재희 앞에서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특히 흥수는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며 자신조차 스스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그런 흥수에게 재희는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한다. 너는 너인 채로도 괜찮으며, 그렇기에 너의 성 정체성도 약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재희의 응원에 힘입어 흥수가 ‘나다움’을 찾아 성장하는 모습은, 같은 고충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한나: 주인공들이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은 상처를 받고, 타인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는 연속적인 여정이었으나, 결국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은: “내가 나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려준 내 20대의 외장하드. 잘 가라 재희야.”
성별과 성적 지향성이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하고 멀어지고 다시 사랑하는 재희와 흥수의 모습에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차별과 아픔 속에서 서로가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던 재희와 흥수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서로를 보듬어주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채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퀴어 영화다. 퀴어 당사자인 흥수와 그의 친구 재희가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다움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은, 같은 고충을 겪는 이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논퀴어가 퀴어 당사자와 연대하여 누구든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받고, 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강승 작가의 전시, 웹툰 <정년이>, 그리고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통해 우리는 다채로운 정체성과 그에 따른 경험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퀴어적 요소는 예술을 통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궁극적으로, 사랑과 정체성은 자유롭게 표현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의미를 가진다. 서로의 다양성을 차별 없이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Copyright 2024. Dear.A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해당 사이트에 게시된 작품 사진과 매거진의 저작권은 작품의 아티스트 및 매거진 에디터에게 있으며, 무단 복제 및 2차 가공을 금합니다.
director. 이예은
editor. 강채현, 김한나
artwork. 이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