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5 환기




날씨 탓을 하며 움츠리던 계절이 지나, 몸을 일으켜 뭐든 시작할 수 있는 계절이 왔다. 걷기도 전에 뛸 순 없으니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예열 단계로 ‘환기’를 제안한다. 환기는 ‘주의나 여론, 생각을 불러 일으키다.’ 라는 뜻과 함께 ‘탁한 공기가 맑은 공기로 바뀌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시를 통해 예술에 대한 시선도 환기하고, 걸음마다 자연과 닿을 수 있는 부암동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환기해보자.







서울미술관 전시 3650 storage 인터

전시정보 


3650 storage-인터뷰는 서울미술관의 개관 10주년 두 번째 기념전시로, 지난 3650일 동안 서울미술관을 통해 소개된 48명의 현대미술 작가들의 최근작 200여점을 소개한다. 회화, 사진, 조각, 설치, 영상 등 여러 장르를 모은 이번 전시는 서울미술관 역대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 전시로 이 시대 작가로서 안고 있는 고민과 비전,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했다. 흔히 보던 작품정보 대신 영감의 출처, 예술가의 삶과 어려움, 후배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같은 질문으로 하여금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으며 작품의 시선에 깊이를 한층 더한다.


전시장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아홉 명의 학문과 예술의 여신 ‘뮤즈(muse)’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될 아홉 개의 공간으로 기획하였다. 공간마다 붙은 시적인 짧막한 문구는 서로 다른 작품들 간에 연결고리를 만들고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1st Mousa 마음을 다하여, 나의 하루에게

2nd Mousa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부르나요

3rd Mousa 눈물을 지우고, 희망을 쓰고

4th Mousa 춤추는 하루의 끝

5th Mousa 누구도 모르는 낙원

6th Mousa 네 마음을 잊고, 내 마음을 잇고

7th Mousa 한 걸음 뒤로, 두 뼘 앞으로

8th Mousa ( )이 없는 나의 시간

9th Mousa 마음을 더하여, 나의 인생에게 


매일 오후 2시에 진행되는 정규 도슨트 프로그램은 사전예약이나 용이 따로 없어 현장에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휴대폰으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 가이드 또한 무료로 제공된다. 20명 이상 단체 방문시 별도의 예약을 통해 원하는 시간에 전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위 전시는 2023년   4월 16일에 막을 내린다.







● 1st Mousa 마음을 다하여, 나의 하루에게 

: 황선태 <빛이 보이는 방>


황선태 작가는 2010년부터 빛과 유리를 소재로 미디어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빛과 유리를 소재로 '유리 드로잉' 작업을 하며 순간을 형상화하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다. 유리 위에 선으로 그려진 2차원의 그림은 다채로운 빛들에 비쳐지며 공간감과 조형미를 가진 입체 공간으로 변한다. 



초록이 우거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담은 그림이 묘하게 시선을 끈다. 평면임에도 구체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황선태의 <빛이 보이는 방>’은 보고 있으면 공간의 온도가 전해진다. 강화 유리에 샌딩, 유리전사로 그려낸 작품 위로 질감이 된 빛과 그림자는 흑백이 주를 이룬 그림 에 안정감을 준다. 실내에서 보이는 창 밖의 풍경은 그려진 것 외의 다른 세계를 생각하게끔 만든다. 낮은 채도 위 내리쬔 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괜시리 멀리 다녀온 기분이 들고 작품을 가로지르는 빛을 쬐다 온 듯 마음이 설설 덥혀온다.







● 2nd Mousa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부르나요 

 : 정소윤 <안정으로 가는 길>


정소윤 작가는 ‘섬유’를 드로잉 도구로 삼아 독자적인 방식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드러낸다 자연의 거대함 속 생명의 근원에 대해 사유하고,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매개체들을 조형 작업으로 재해석한다.




決然(결연), 창작의 근원은 간절함이 빚어낸 소망이다. 불안하지만 안정을 찾아가는 출산 과정에서 탄생한 ‘정소윤의 <안정으로 가는 길>’은 결연해지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작품을 가까이 보면 얇은 실을 켜켜이 꿰어 하나의 단단한 형체를 만든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남은 한 올의 실은 또 다른 안정도 꿸 수 있다는 소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인고의 시간이 드러나는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숭고한 마음을 품게 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과정을 충실히 행하다 탄생한 이 작품의 현실을 친애한다.



: 콰야 <어느 비 오는 날>


콰야 작가의 일러스트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을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포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곤 한다. 앨범 커버 재킷 및 여러 상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유분방한 작품 세계와 넓은 활동반경을 보여준다,



<어느 비 오는 날>은 한 우산을 나눠 쓴 두 아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선들은 전부 뭉개진 듯 구분이 모호하나, 오히려 그러한 모호함이 따뜻한 색감과 어우러져 온화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배경에 그려진 비와 도심 속 불빛은 두 아이들의 모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특히 입가에 연한 미소를 띈 초록 머리 소녀와 그런 소녀를 곁눈질로 바라보는 갈색 머리 소년의 모습은 서로 대비되어, 정적인 그림에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 3rd Mousa 눈물을 지우고, 희망을 쓰고 

: C’mon tigre <TWISH INTO ANY SHAPE>


커먼 티그레는 전 세계 예술가와 협업하는 음악 듀오 그룹이다.

이따금씩 필자는 편협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테면 강아지 다리는 4개고 ‘차 위에서는 사람이 뛸 수 없다’는 등의 생각을 할 때면 말이다. 하지만 커먼 티그레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마땅한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나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음악과 영상이 혼합된 비디오 아트 물로, 인체의 움직임을 매개로 웹상의 쓸모없는 조각들을 한 데 모아 초현실적인 춤을 만들어 낸다. 3분 이내의 영상 안에 수천 번의 모션을 담아내어 눈을 쉽사리 뗄 수 없다. 나의 얼굴이 불이나 이모지 등으로 바뀌는 유쾌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미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세상에서 매사에 원인을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짧은 호흡에 유쾌한 해방감을 주는 커먼 티그레와 같은 휴식도 필요하다. 

 


: 안준 <self-portrait>

안준 작가는 인간의 눈으로 인지되지 않는 빠른 속도의 현상에 관심을 두고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 이미지를 통해 현실 속의 생경함과 우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self-portrait>은 돌아가신 할머니 댁의 거실과 정원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하얀 얼음과 대조되는 불꽃의 형상에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잡을 수 없는 이를 향한 그리움과 함께 막을 수 없는 상실이 느껴졌다. 현실에서는 보지 못하는 형상을 뚜렷한 사진으로 마주하면서,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 4th Mousa 춤추는 하루의 끝 

: 염지희

염지희 작가는 연필과 콩테를 사용해 콜라주 작업을 한다. 심경이나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작업하며, 여러 테마의 다양한 이야기를 화폭에 담는다. 회화 작품을 시나리오 삼아서 설치, 영상, 게임 등 다양한 장르로 표현을 확장하는 일에 주로 몰두하고 있다.



흑백의 그림들 속에 서사가 있어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꿈 속에서 마주할 법한 다양한 요소가 모여진 콜라주 작업은 관객들이 상상하게끔 무대를 만든다. 해석이 모호한 복합적인 구성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열어놓아, 보는 이마다 색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재미가   있다. 불편한 감정들과 고독의 공간에서 비롯된 이미지이지만, 은빛으로 빛나는 그림은 따듯하게  다가온다.







● 6th Mousa 네 마음을 잊고 내 마음을 잇고 

: 이이립  <The Resonance-‘flat’_#2 - #6>

이이립 작가는 에너지의 공진 사이에서 파열하면서 생겨나는 이미지를 포착한다. 무의식의 세계에 있던 것들이 외부의 자극을 통해 의식의 세계로 떠오르는데, 작가는 이를 모티브로 상호 에너지의 창조적 상상을 보여 준다.



과묵하게만 보이는 벽 안의 세상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이립 작가의 <The Resonance-‘flat’> 시리즈는 유화 물감을 사용한 작품으로, 평면적인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림임에도 가운데 부분이 홈처럼 파여 있는 듯한 착시 효과를 자아낸다. 이러한 착시는 관람자와 작품 간의 거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에,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즐길 수 있다. 한없이 ‘플랫’한 공간 속에서의 공진은 되려 깊이를 주면서 개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 설은아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설은아 작가는 2018년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를 선보이며 석파정 서울미술관, 소다미술관, 평창 남북평화영화제, 현대백화점 등에서 전시를 이어 나갔다. 이 전시는 소외된 소통을 주제로 하며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형태다. 



이제 감상자가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미술관의 시대는 끝났다. 감상자가 주체가 되어 창조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대세다. 설은아 작가는 이 트렌드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다. 아날로그식 전화기들이 즐비한 가운데 전화 부스가 눈에 띈다. 그곳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개운했다. 기대를 품고 들어간 곳에서 만난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내면의 아이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라고 했을 때 단박에 떠올린 건 ‘화’였다. 세상의 끝인 사하라 사막에 내 목소리를 놓아주고, 울리는 벨 소리에 귀를 기울여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를 들었다.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으며 누군가는 묵혀둔 이야기를 꺼냈다는 개운함을 느낄 것이다. 사람 간의 소통이 뭐길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 만으로 위로를 받는 걸까. 







● 7th Mousa 한 걸음 뒤로, 두 뼘 앞으로 

:  엄익훈 C’mon tigre <TWISH INTO ANY SHAPE>


 엄익훈 작가는 단순한 조형작품을 제시하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를 드라마틱하게 장치하여 조각과 그 그림자를 한 공간에 제시한다. 그림자의 형태는 조명의 강도와 각도에 따라 왜곡되어 실재와 허상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봉 고데기로 돌돌 말은 듯한 스틸판을 추상적으로 꼬아낸 모양의 조각에 조명을 비추어 평면의 벽에 그림자로 그림을 그린다. 유난히 기웃거리며 감상하고 싶은 ‘엄익훈의 <춤추는 소녀>,<바이올린을 켜는 소년>, <발레리나 되기>’는 유년기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아 1개의 시리즈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형태를 사용하면서도 보편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성공 한게 인상 깊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의 전시를 관람한 후, 엘리베이터 너머에 있는 야트막한 출구를 따라가다 보면 석파정의 드넓은 전경을 마주할 수 있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서였던 곳으로, 이름 역시 흥선대원군의 호인 ‘석파’를 따서 지어졌다.


유수성중관풍루라고도 불리는 이 공간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조선 시대 건축물과는 달리 청나라풍의 꾸밈벽과 기둥이 인상적이다.

서울미술관의 옥상에서는 석파정을 제외하고도 소수운렴암각자, 신라삼층석탑과 같은 다양한 건축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은 약 6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송인 천세송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그늘 아래, 석파정을 거쳐간 수많은 인파와 그들이 남긴 흔적을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쉼터를 조성해 준다.







맛과 멋 모두 놓치고 싶지 않다면 – 카페 르모브




한국의 운치를 담은 석파정 맞은편에는 위치처럼 대비되는 분위기의 카페가 있다.

홍고 벽돌과 아치형의 출입문은 프랑스 박물관을 연상시키고 236이라는 숫자는 비밀스럽게 초대된 느낌마저 준다.



탁 트인 내부 한 켠에는 생경한 장면이 이어진다. 디저트 미술관이라고 들어보았을까? 디저트 모형 옆에 놓인 돋보기는 단번에 ‘전시’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주문 전 돋보기를 활용해 먼저 눈으로 맛보며 주문을 기대하게 된다. 디저트 관람이 끝나면 옆 키오스크로 주문이 가능하다.


르모브는 ‘나의 빛(le mauve)’ 이라는 수공예 주얼리 브랜드의 쇼룸도 겸하고 있다. 빛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쏟아지는 채광 아래의 주얼리가 눈에 들어왔다. 원하면 바로 구매도 가능하다. 조명의 각도에 따라 변화하는 분위기를 통해 조명이 공간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다는 덧을 느낄 수 있다. 통창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함은 당신을 단숨에 편안하고 나른하게 만들 것이다. 르모브를 오래, 깊이 경험하고 싶다면 볕이 잘 드는 낮 12-2시에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화장실은 취식 공간과 분리가 되어있어 쾌적하며, 보다 프라이빗한 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장 안 쪽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editor. 현지이, 이루아, 나예원, 이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