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1 숨김의 미학

 



INTRO



지나가는 시선을 잡기보다

취향이 맞는 사람들의 온전한 사랑을 채우다.

본질에 집중하는 공간들의 이야기.


w. 하인애






20세기와 21세기의 시간이 을지로라는 공간에 길이 공존하고 있다. 공구상과 철물상. 공업소 그리고 여러 출판 업소에 종사하시는 근로자들과 '힙지로' 라는 공간을 찾아 여유 시간을 즐기기 위해 방문한 20대의 젊은이들이 함께 길은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을지로 공간들의 특징은 따로 간판 없이 운영되어 그저 사람들의 입소문과 SNS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간판 없이 숨김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는 공간들을 찾으러 을지로에 방문하였다. 





 도탑다



을지로3가역 주변에서 서로 다른 높이의 낡은 건물들을 올려다본다. '00출력소', '00아크릴', 그리고 '광고 기획' 까지 마치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는 듯한 형형색색의 간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이에서 ‘도탑다'는 마치 자신을 알아줄 누군가를 기다리듯, 어떠한 간판이나 조명 없이 작은 포스터에 의지해 어두운 계단 끝에 숨어있다. 



계단 끝에 다다른 뒤 입구를 살펴보면 기존 을지로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큰 철문 위에는 일어가 적힌 종이들이 부착되어 있는데, 하나씩 살피다 보면 이 공간이 어떤 곳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노랗게 변색되었지만 화려한 종이들을 통해, 오래된 패션 잡지를 펼친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이곳 ‘도탑다'는 북카페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도탑다'의 공간이 한눈에 보인다. 화려한 문구로 지면을 빠짐없이 채우는 일본 잡지 특유의 배치처럼, 이 작은 공간은 개인의 취향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은 쉽게 찾아보지 못하는 구형 텔레비전을 비롯한 각종 빈티지 전자제품은 외부와 단절되어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매력적인 여러 빈티지 패션 아이템과 굿즈 역시 눈에 띈다. 빈티지라는 큰 틀 안에서 한 사람의 취향이 묻어나는 공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도탑다’는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북카페라고 정의하고 있는 만큼, 공간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큰 탁자 위에 놓인 잡지들이 방문객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다. 사람들에게 ‘도탑다'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의 경제 호황기 시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빈티지 패션 잡지들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뽀빠이(POPEYE)에서 라이트닝(Lightning), 그리고 프리엔이지(Free&Easy)까지 아주 오래전 그 시대의 트렌드와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이를 풍미했던 에디터들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빈티지 잡지를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원한다면 그에 맞는 값을 지불해 소장할 수도 있다.



잡지에서 잠시 눈을 떼고 반대편 벽을 바라보면, 빛바랜 종이들 속에서 하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 속 인물은 의자에 앉아 패션 잡지를 읽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앞에는 여러 권의 잡지가 쌓여있고 그 위에는 드립커피 한 잔이 올려져 있다. 그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인다. 어쩌면 이 그림은 모든 방문객이 ‘도탑다’의 공간을 편안히 즐기길 바라는 주인장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영업시간 매일 오전 12시부터 오후 8시까지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52-2 3층 

인스타그램 @_dotopda





 호텔 수선화


을지로3가역에서 내려 ‘호텔 수선화’가 있는 건물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도 어플이 안내해주는 경로를 따라 주소 근처로 가 보면 막상 인쇄업소들 말곤 카페는 보이지 않는다. 방문했던 당시 늦은 저녁이었는데, 어둡고 음산한 거리 분위기에 간판도 없어서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보이는 첫 번째 사진이 ‘호텔 수선화’의 간판이다. 사실 간판이라기보단 벽화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 모른다.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조금 더 올라오라는 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간판 없는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여 있는 배려 같았다. 



‘호텔 수선화’는 건물 4층에 있었는데,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빈티지 느낌이 물씬 나는 소품들을 배치해 영화 세트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4층 입구에도 간판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을 발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찾기 어려운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는 꽤 많은 손님이 있었다. 내부를 잠깐 둘러보니 카페라고 하기엔 굉장히 많은 종류의 술병들이 진열돼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직원 분이 메뉴판을 갖다 주셨다. 메뉴판을 자리에서 보고 고른 후 다시 카운터에 가서 주문하는 방식이다. 음료는 직접 자리로 가져다 주셨다. 생각보다 다양한 메뉴를 판매하고 있었다. 

카페 음료뿐 아니라 맥주와 칵테일, 와인 그리고 여러 종류의 디저트와 음식 등 낮에 가서 커피 한 잔 하기에도 좋고, 저녁 시간에 잠깐 들러 가볍게 알코올을 섭취하기에도 제격일 듯 싶다.



내부 인테리어를 보니 뉴트로 빈티지에 어울리는 조명들이 굉장히 많았다. 조명들은 가게 내부에 퇴폐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하였지만, 저급하진 않았다. 또한, 복고풍 무늬 패턴의 전등갓이 여러 개 있었는데 밝은 색깔의 전등갓들이 공간을 더 화사하게 만들어주었다. 천장은 인테리어가 되어 있지 않았다. 노출된 천장과 콘크리트, 그리고 바닥을 향해 길게 드리워진 램프 등 이러한 날것의 공간은 오히려 을지로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 했다. 



‘호텔 수선화’는 을지로 일대가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존 을지로가 갖고 있었던 오래된 이미지의 공간을 최대한 변형하지 않은 채로, 찾아오는 많은 이를 맞이하고 있다. 혹자는 간판이 없는 것이 공간 입장에서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하진 않을까 걱정한다. 찾아가는 과정이 조금 불편할 수 있겠지만 한번 방문하고 나면 이 경험 또한 인상에 깊이 남는다. 숨겨진 보물을 찾는 기분이 이러한 것일까. 을지로엔 ‘호텔 수선화’ 말고도 간판 없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들이 많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 보고 싶다면 을지로에 방문해 지도 없이 하나씩 직접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영업시간 매일 오전 12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일요일, 월요일은 오후 11시까지)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7길 17 4층 

인스타그램 @hotel_soosunhwa






 그랜마캐비넷



끝없이 이어진 어수선한 분위기의 길거리 사이, 어두운 느낌을 풍기는 노래방이 하나 보인다. 알 수 없는 알파벳으로 쓰여진 간판과 노래방 사인을 보면 이곳을 소품샵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당 가게를 노래방으로 오해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까. 입구에는 소품샵임을 알리는 배너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타고 3층으로 올라가면, 옛날 노래방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가게 밖에서 느꼈던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은 친근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옛날 가정집과도 같은, 마치 할머니 집에 놀러갔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과 비슷하다.

 



공간을 둘러보니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보물찾기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서랍장을 열면 나왔던 옛날 동화책, 벽에 붙어 있던 부모님의 어린 시절 사진, 상장, 그리고 추억의 물건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듯한 공간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를 간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앤티크한 소품을 판매하는 가게의 콘셉트과 매우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게 구성은 옛날 노래방과 동일하다. 운영 데스크를 지나 보이는 긴 복도를 따라가면 각기 다른 테마의 소품을 전시하고 있는 노래방 부스가 나타난다.



악세사리, 의류, 홈데코, 그리고 다채로운 아기자기한 소품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방을 하나씩 구경하다 보면 소품들 사이에서 나만의 보물을 찾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주변을 모두 둘러보았다고 생각했을 때면, 복도 끝에 한 대의 게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추억의 게임들로 가득한 이 게임기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가게의 콘셉트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소품샵과 노래방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독특한 공간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영업시간 매일 오전 12시부터 오후 8시까지

(매주 화요일 정기 휴무)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7길 42 3층 

인스타그램 @grandmacabinet





 신도시



옛것과 현재가 공존하는 을지로. 바 ‘신도시’의 간판은 을지로에 오래 자리 잡고 있던 건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투박하면서도 빛바랜 특유의 색상은 왠지 모르게 매장 내부에 대한 호기심을 주었다. 5층에 위치해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지만, 각 층을 오를 때마다 보이는 화려한 인테리어가 가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이곳저곳 붙어있는 포스터는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신도시’에서 펼쳐질 디제잉 파티 예고부터 한때 유행했던 애니메이션을 오마주한 것까지 화려한 포스터와 스티커에 시선을 빼앗길 때쯤, 어느덧 ‘신도시’가 눈앞에 위치해있었다.



매장 내부 또한 키치한 분위기의 포스터와 스티커, 형형색색의 조명들로 꾸며져있었다. 원색의 선명한 대비가 주는 강렬함은 눈의 즐거움을 한층 높여주었다. 휴지갑을 이용해 만들어진 십자가 조형물이나 전구를 이용해 만들어진 총 모양 조형물은, 일상용품이 가진 예술로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들은 방문자로 하여금 바깥과는 분리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끔 한다. 마치 을지로가 아닌 어딘가 이름 모를 새로운 공간, 그야말로 ‘新’도시였다.



카운터 한편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주류들은 신도시가 어떤 메뉴를 취급하는지 짐작하게끔 했다. 글렌피딕, 호세쿠엘보, 예거마이스터 등 애주가라면 모를 수 없는 대중적인 술부터 그렇지 않은 낯선 술들까지 즐비했다. 신도시의 메뉴는 다양했다. 애주가들을 위한 다양한 위스키, 맥주, 칵테일부터 시작해서, 논알콜 메뉴인 차, 주스 등도 준비되어 있었다. 더불어 요기를 위한 팝콘이나 해시브라운 등 간단한 안주도 준비되어 있어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었다. 아주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신도시’라는 공간이 주는 새롭고도 묘한 분위기는 익숙한 맛도 특별하게 느끼도록 했다.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웅장한 디제잉테이블과 그래피티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통해, 수많은 DJ들이 주말마다 이곳을 음악의 열기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신도시’. 가게의 이름에 걸맞게,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분위기에서의 시간을 선사하는 공간이다. 투박한 간판으로 숨겨져 있는 ‘신도시’ 특유의 새로움은, 숨김의 미학을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경험이다.



영업시간 월화수목 : 오후 7시부터 익일 오전 1시까지

금토 : 오후 7시부터 익일 오전 2시까지

일 :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1길 31 5층 

인스타그램 @seendosi




Editor. 김진우, 김재우, 박성민, 이지민

Designer. 이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