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아르헤리치의 말> 유수연

  

관록(貫祿)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요령이나 지름길 같은 것으로는 결코 쌓을 수 없는, 시간 의 물리성만이 증명해주는 지혜와 힘을. 그리고 그들은 많은 순간 젊음의 등대가 된다. 80년 동안 하나의 길만을 걸어온 예술가를 설명할 때 관록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있을까. 여든을 넘긴 아르헤리치는 세 살부터 피아노를 쳤다. 그 아득한 시간을 두고 아르헤리치는 ‘나는 피아노와 함께 태어났으니 엄마가 힘드셨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하얗게 센 잿 빛 머리카락의 아르헤리치를 떠올려 보자. 누가 그의 초상을 보여준 것도 아닌데 어디 한 곳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운 예술가의 실루엣을 그리게 된다. 정작 당사자는 그 틀에 박 힌 초상을 본다면 한 번 픽 웃고는 쉽게 잊어버릴 것이다. 

   

아르헤리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나에게 정말로 관심이 없어요. 나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남들의 일에 열광하고, 그게 행복해요. 평생 연주를 많이도 했는데 즐거웠던 적은 없어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피아노 없이 살았던 날보다 피아노와 함께 살아간 날이 훨씬 많 다. 그럼에도 아르헤리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를, 피아노를 뺀 자신의 삶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예술가이며 피아니스트이기 이전에 자신이 한 명의 사람임 을 결코 잊지 않는다. 가장 성공한 연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가 실제로는 소탈하다 못해 자의식이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믿기란 어렵다. 

     

하지만 ⟪아르헤리치의 말⟫을 저술한 인터뷰어 올리비에 벨라미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며 아 르헤리치의 삶을 슬쩍 엿보면, 그녀는 사람과 자유를 사랑하는 개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방랑벽을 가진 나그네처럼 계획 없이 훌쩍 떠나버리고, 거창한 초대 없이 누구든 집에 초대해서 머무르게 하고, 그 무엇에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다못해 피아노 연주조차 자신을 위한 일도, 청중을 위한 일도 아니며 그저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고 말한다. 피아니 스트는 창작자가 아닌 해석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음악에 있어 항상 겸손해야 한다며 직업에 있어서도 분명히 선을 긋는다. 

     

아르헤리치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무의(無意)다. 이 행위와 삶과 위대한 커리어에 아무런 의미 가 없다고 말한다. 그 무엇도 자신이 의도하고 계획해서 해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됐을 뿐이 라고. 유년기부터 빛나는 재능을 세상에 보이며 온갖 시선과 말 속에서 살아온 천재가 찾아낸 길은 이토록 무심하다. 

    

이따금 예술이나 체육을 하는 이들에게서는 구도자와 같은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무시무시 할 정도의 뚝심, 가장 쉽지만 동시에 가장 힘든 길을 고집하는 꾸준함, 반복되는 연습에 무뎌 진 차분함. 하지만 아르헤리치는 구도자라고 명명하기엔 자유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인물이다. 만약 누군가 그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그저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기대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남들의 사연에 너무 골몰해 있어요. 이제 나 자신을 찾아야겠어요. 그리고 나 연습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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