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흘러가는 시간을 유보하고 싶을 때,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거실을 빙빙 돈다. 동시에 에어팟을 끼고 스포티파이에서 ‘좋아요 표시한 곡’을 랜덤 재생한다. 그다음, 결정해야 하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은 골치 아픈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2.
얼마 전,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1962)를 봤다. 고다르의 영화를 한 번쯤 보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누벨바그 영화에 대해서도, 고다르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단편적인 정보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영화는 어려웠다. 영화의 미학적 스타일과 주제의식 모두 난해했다. 나나가 노년의 철학자와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는 대사가 있었다.
나나가 말한다.
- 사람은 자주 조용히 침묵 속에 살아야 해요. 말을 할수록 그 의미가 사라져요.
그 뒤에 철학자는,
-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 소통하려면 말을 해야죠. 그게 인생이고.
라고 말한다.
철학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나나를 옹호하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선 말이 필수적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말이 불필요하다고 느낀다. 넘치는 말은 가볍다. 그만큼 빠르게 소모된다. 상대는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하 고 싶은 말만 쏟아낼 때, 억지로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을 때 말은 힘을 잃는다.
나는 침묵을 좋아한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이 주는 느긋함과 편안함이 좋다.
말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
.
.
나나는 갑작스레 생을 마감한다. 죽어가는 그녀를 카메라는 어떠한 기교도 없이 무심하게 포착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크레딧이 올라간 검은 화면엔 삶과 죽음, 실존, 허무, 삶의 부조리와 같은 문장 으로 구조화되지 않는 단어들이 표류했다. 그리고 나나를 연기한 안나 카리나의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얼굴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우울하게 내리깔던 눈꺼풀도.

(출처 : film-grab.com)
3.
나는 엽서나 스티커, 포스터 같은 굿즈를 모으는 걸 좋아한다. 택배로 받은 예쁜 포장지나 끈, 티켓, 우 표, 심지어 옷 태그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이상한 취미도 있다. 문제는 쓰지 않고 모아두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평소 좋아하던 작가님의 아트북 클래스를 신청했다.
루즈링을 활용해서 자기만의 취향과 감성이 담긴 아트북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두 시간 동안 자르고, 붙이고, 그리는 과정에서 정말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다. 나는 우연이 빚어내는 절묘한 조화를 좋아하는데, 그러한 순간을 몇 번 마주했다. 어떻게 자료들을 톤에 맞추어서 조합하고, 유기적으로 배치할지 고민 하는 것도 재밌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여백을 비워두지 못하고, 망치는 걸 두려워한다. 결과물보다도 값졌던 건 익숙함 속에 숨겨진 다양한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고 싶다면 새로운 상황과 환경에 스스로를 던져야 한다.
4.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손등이 울긋불긋 벌게져 있길래 왜 이렇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표정관리가 안 돼서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올릴 때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손등을 긁는다. 나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버릇이다.
5.
저번 학기 어느 수업에서 교수님이 레이먼드 카버의 <이웃 사람들>이라는 단편소설에 대해 언급했다. 소설 속 ‘열쇠’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의미심장한 소재이지만, 아주 사소하게 제시된다는 설명과 함께. 흥미진진한 전개에 막 몰입해서 듣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일부러 결말을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열쇠가 뭐 어떻게 된 건데?
학기가 끝난 지 꽤 됐지만, 나는 계속 그 이야기가 맴돌았다. 결국, 단편 소설집을 사버렸다. 결말은 싱거웠다. 오히려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결말은 같은 책의 1장에 수록된 <뚱보>였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8월이다.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8월의 어느 날, 주안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이 문장을 읽었다. 단 세 문장에서 발산되는 자기 확신이 나에게도 전염되었다. 예전엔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면, 요즘엔 삶을 더 곱씹어 본다. 어떻게 하면 하루를 더 밀도 있게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Editor. 김지현
1.
흘러가는 시간을 유보하고 싶을 때,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거실을 빙빙 돈다. 동시에 에어팟을 끼고 스포티파이에서 ‘좋아요 표시한 곡’을 랜덤 재생한다. 그다음, 결정해야 하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은 골치 아픈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2.
얼마 전,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1962)를 봤다. 고다르의 영화를 한 번쯤 보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누벨바그 영화에 대해서도, 고다르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단편적인 정보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영화는 어려웠다. 영화의 미학적 스타일과 주제의식 모두 난해했다. 나나가 노년의 철학자와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는 대사가 있었다.
나나가 말한다.
- 사람은 자주 조용히 침묵 속에 살아야 해요. 말을 할수록 그 의미가 사라져요.
그 뒤에 철학자는,
-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 소통하려면 말을 해야죠. 그게 인생이고.
라고 말한다.
철학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나나를 옹호하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선 말이 필수적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종종 말이 불필요하다고 느낀다. 넘치는 말은 가볍다. 그만큼 빠르게 소모된다. 상대는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하 고 싶은 말만 쏟아낼 때, 억지로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을 때 말은 힘을 잃는다.
나는 침묵을 좋아한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이 주는 느긋함과 편안함이 좋다.
말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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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는 갑작스레 생을 마감한다. 죽어가는 그녀를 카메라는 어떠한 기교도 없이 무심하게 포착한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크레딧이 올라간 검은 화면엔 삶과 죽음, 실존, 허무, 삶의 부조리와 같은 문장 으로 구조화되지 않는 단어들이 표류했다. 그리고 나나를 연기한 안나 카리나의 창백하고 무미건조한 얼굴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우울하게 내리깔던 눈꺼풀도.
(출처 : film-grab.com)
3.
나는 엽서나 스티커, 포스터 같은 굿즈를 모으는 걸 좋아한다. 택배로 받은 예쁜 포장지나 끈, 티켓, 우 표, 심지어 옷 태그도 버리지 않고 쌓아두는 이상한 취미도 있다. 문제는 쓰지 않고 모아두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평소 좋아하던 작가님의 아트북 클래스를 신청했다.
루즈링을 활용해서 자기만의 취향과 감성이 담긴 아트북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두 시간 동안 자르고, 붙이고, 그리는 과정에서 정말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다. 나는 우연이 빚어내는 절묘한 조화를 좋아하는데, 그러한 순간을 몇 번 마주했다. 어떻게 자료들을 톤에 맞추어서 조합하고, 유기적으로 배치할지 고민 하는 것도 재밌었다.
4.
자고 일어났더니 왼쪽 손등이 울긋불긋 벌게져 있길래 왜 이렇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표정관리가 안 돼서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올릴 때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손등을 긁는다. 나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버릇이다.
5.
저번 학기 어느 수업에서 교수님이 레이먼드 카버의 <이웃 사람들>이라는 단편소설에 대해 언급했다. 소설 속 ‘열쇠’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의미심장한 소재이지만, 아주 사소하게 제시된다는 설명과 함께. 흥미진진한 전개에 막 몰입해서 듣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일부러 결말을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열쇠가 뭐 어떻게 된 건데?
학기가 끝난 지 꽤 됐지만, 나는 계속 그 이야기가 맴돌았다. 결국, 단편 소설집을 사버렸다. 결말은 싱거웠다. 오히려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결말은 같은 책의 1장에 수록된 <뚱보>였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8월이다.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8월의 어느 날, 주안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이 문장을 읽었다. 단 세 문장에서 발산되는 자기 확신이 나에게도 전염되었다. 예전엔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면, 요즘엔 삶을 더 곱씹어 본다. 어떻게 하면 하루를 더 밀도 있게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Editor.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