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조시연] 8565일의 썸머



막히지 않고 술술 써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칭 타칭 ‘썸머 러버(summer lover)’답게 사계절을 그 여름의 기억으로 살아내는, 여름이 사랑이고, 사랑이 여름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과유불급은 여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나 보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 듣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녀서 그저 한 뭉텅이의 실타래 같은 마음만 덜컥 원고 속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다. 이 실을 어디서부터 잡아당겨야 엉키지 않고 여름에 대한 내 마음을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해봤는데, 쉽지 않다. 이거, 한 편으로는 안 된다. ‘대체 여름을 왜 좋아하시나요.’ 라는 물음에 3박 4일 정도 필리버스터하며 답을 내리면 해결이 될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름이 왔다.


여름을 생각한 지 8200일쯤 되었을 때, 기가 막힌 문장 하나를 읽었다. 여름에 하는 사랑은 점성이 높은 것 같단다. 백가희 작가의 SNS에 게재된 이 짧은 문구가 미소를 머금은 채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 ‘이모지(emoji)’마냥 감명 받은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점성이 높았구나. 우리는, 적어도 나는 이 점도 높은 사랑에 못 이겨 더움과 뜨거움과 습함이 공존하는 다소 불쾌한 계절을 청춘으로, 푸르름으로, 사랑 그 자체로 묘사하고 있다. ‘여름이었다.’ 라는 ‘밈(meme)’ 아닌 ‘밈’이 다수의 공감을 받으며 유행할 수 있었던 까닭도 이 끈끈함에서 비롯되었으리라.


7835일의 여름에는 능소화의 존재를 자각했다. 이전에는 입에 담아 발음해본 적도 없던 그 꽃을 발길 닿는 곳마다 예리하게 눈을 뜨고 찾아다녔다. 내가 선생이지만 가기 싫어 몸부림쳤던 과외 수업도 학생의 아파트 단지에 흐드러진 능소화 넝쿨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참을 만했다. 인위적인 조합 없이 아름다운 주황빛을 내는 모양새가 여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해에는 구름도 특별했다. 흰 물감으로 한 겹 한 겹 쌓아 올린 수채화 같은 구름이 내 사진첩을 꾸준히 메우며 여름이 주는 두근거림을 고조시켰다.


7105일의 여름에는 찰나의 들숨에도 높은 점성이 느껴져 1000일 이상을 지나온 지금까지 발이 묶여 절절매는 기억이 있고, 6010일의 여름에는 ‘내가 미쳤었나 보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어린 만큼 패기 가득했던 순간이 있다. 8565일을 지나는 오늘의 여름은 태안의 한 바닷가에 잠시 머물러 있는데, 나의 ‘썸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에 이 방대한 여름을 다 풀어낼 때까지 잠시 숨을 고르며, to be continued …






Editor. 조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