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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작품 속 지나친 불행,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작품 속 지나친 불행,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영화, 드라마, 소설 속 주인공들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는다. 성장 배경부터 작품의 주요 사건들까지 끊임없이 시련을 겪는 기구한 운명이 주인공에게 주어진다.

 

어쩌면 당연시했던 캐릭터의 불행에 대해, 불행을 전시해 눈물을 이끌어내는 방식에 대해

최근 대중들은 ‘불행 포르노’라는 말로 불쾌감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 속 불행은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할까’

‘등장인물이 겪는 불행은 전부 불행 포르노인가’

불행 포르노의 정의부터 등장 원인, 불행 포르노의 경계까지.

 

[12월호. 도덕과 예술, 그리고 양심]에서 다룬 ‘불행 포르노’에 관한

조금 더 깊고 다양한 이야기.


 



 

# 불행 포르노, 캐릭터 학대?


윤주: 

주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콘텐츠에서 캐릭터의 불행을 과도하게 부풀려 전시하는 작품을 부정적으로 말할 때 ‘불행 포르노’라는 말을 써요. 캐릭터의 불행이 보는 이들에게는 자극이 되기 때문에 그 특성을 포르노라고 이야기하는 듯해요.

 

예은: 

맞아요. 일반적으로 작품 속 캐릭터에게 작위적인 불행을 주입해 불행을 전시하고, 캐릭터와 콘텐츠를 자극적이고 억지스럽게 표현하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해 생겨난 단어더라고요.

 

윤서: 

이러한 불행 포르노는 캐릭터를 필요 이상으로 불행하게 설정해 우울감과 동정심 등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요. 이야기 흐름과 감정을 위해 캐릭터의 불행을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점 때문에 일종의 ‘캐릭터 학대’라고도 불리고 있어요.

 

예은: 

그런데도 불행 포르노라는 단어가 생겨난 건, 어쩌면 요즘의 대중들은 불행한 캐릭터를 보는 것에 지쳐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깊이 빠져들지 않고 가볍게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호하고, 우울한 감정에 반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해요.

 

윤주: 

맞아요. 불행 포르노처럼 자극적인 오락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타인의 불행을 굳이 시간 내서 찾아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나 작품의 예술성과 미학성, 콘텐츠의 질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개연성이 미흡한 작품을 선호하지 않으니까요.

 

윤서: 

개연성이 없는 작품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기도 한 것 같아요. 요즘은 콘텐츠가 워낙 다양해져서 호불호도 크게 나뉘고 감상하는 대중들의 수준도 많이 높아졌잖아요. 개연성이 부족한 억지스러운 불행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불행 포르노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되는 거죠.

 



# 불행 포르노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윤주: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감동으로 연결되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흥행 공식처럼 캐릭터가 불행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감동적인 신파극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결국 콘텐츠 소비자의 감정을 이용한 흥행이 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윤서: 

저는 남의 불행을 보면서 자기가 우월하거나 좀 더 낫다고 위안을 얻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버드 대학의 미나 시카리 교수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것은 시민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심리다. 그래서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라고 말했대요.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해 사람들이 불행 포르노를 찾기도 하는 것 같아요.

 

예은: 

창작자 입장에서도 불행 포르노를 양산하기 쉬운 듯해요. 창작자가 개연성을 촘촘하게 짜지 않고 캐릭터에게 쉽게 역경과 고난을 부여하는 방법이 불행 서사를 주입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창작자의 역량 부족이 불행 포르노를 만들어내는 거죠.

 



# 불행 서사와 불행 포르노의 경계


윤주: 

그런데 스토리 전개상 비극이 필요한 경우도 있잖아요. 불행 서사와 불행 포르노의 경계가 어디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저는 연속되는 불행에 개연성이 있는지가 단순 불행 서사와 불행 포르노를 구분한다고 생각해요.

 

예은:

저도 캐릭터를 성장시키기 위한 불행이나 전개를 위한 불행인지, 아니면 단순히 인물을 극한으로 몰아넣는 장치인지가 두 개념의 차이점인 듯해요. 성장을 위한 불행이라도 억지스럽지 않은지 판단해야 할 것 같고요.

 

윤주: 

그리고 불행을 겪는 캐릭터가 어떻게 대응하고 극복해 나가려고 하는지 또한 불행 서사와 포르노를 가르는 경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불행 서사는 역경을 겪어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윤서: 

결국 콘텐츠에서는 개연성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인물의 감정선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도 판단해봐야 한다고 느꼈어요. <메리제인>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메리제인이 여러 불행을 겪는데, 얼마나 불행한지를 보여주기보다 불행을 헤쳐나가며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불행을 풀어내고 있거든요. 이 작품처럼 개연성과 표현 방법에 따라 불행 서사와 불행 포르노가 나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연극 <메리제인> 이미지 출처: 맨씨어터

 



# 누군가에겐 명작, 누군가에겐 불행 포르노


드라마 <나의 아저씨>/ 영화 <가버나움>

이미지 출처: tvN/ 네이버 영화


 

윤주:

<7번방의 선물>이나 <나의 아저씨>와 같이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이 불행 포르노라는 의견이 있더라고요. 영화 <가버나움> 역시 감동적이라며 극찬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행 포르노다’, ‘신파극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렇듯 같은 작품을 두고도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고 있는데, 불행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의 개념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만큼 아직은 어떤 작품이 불행 포르노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것 같아요.

 

윤서: 

맞아요. 똑같은 작품을 접해도 불행 포르노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소비자 나름이기 때문에 불행 포르노가 과연 부정적이기만 하다고 볼 수 있을까 싶어요. 개개인의 취향이 다를 뿐인데 불행 포르노 콘텐츠를 지양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성급한 것 같고요.

 

예은: 

불행 포르노가 하나의 장르로 이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극한까지 몰린 캐릭터의 행동에서 인간성, 인간의 본질을 볼 수 있기도 하잖아요. 인간의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대중들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콘텐츠로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장르를 선호하는 대중들도 분명 존재하겠죠.

 

윤서: 

불행 포르노라는 단어를 알기 전에도 개인적으로 주인공에게 계속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게 어둡고 우울하게 느껴져 감상하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왜 굳이 불행을 주입하지’ 싶어서 반감이 생겼던 경험도 있고요.

 

예은: 

저도 불행 포르노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감상한 것은 아닌데, 지금 생각해보니 불행 포르노가 아니었을까 싶은 억지스러운 불행과 우울한 분위기의 콘텐츠들이 생각났어요. 반대로 이전에 재밌게 감상하고 넘어갔던 책이나 영화들을 불행 포르노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하고요.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윤주: 

불행 포르노라고 불리는 작품을 예전에 봤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것 같은데, ‘불행 포르노’라고 명명되면서 대중들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조금은 제한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언어가 주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건 다소 위험할 것 같아요.

 

 

 




Editor. 이윤서 이예은 조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