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지적 허영이 불어넣은 취향,
취향으로 향유하는 예술
예술의 ‘빛과 소금’이 될 당신,
당신 삶의 ‘빛과 소금’이 될 예술
w. 이수빈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의 흥행과 성인 독서율
출처: 서울국제도서전 홈페이지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2024)에 따르면 성인 독서율은 43.0%에 그친다. 즉, 성인 10명 중 6명은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국민독서실태조사가 처음 이뤄진 1994년 이래 역대 최저치다. 한편, 올해 6월 열린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는 15만 명이라는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독서 인구가 감소한 상황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의 흥행은 통념에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서울국제도서전은 어떻게 성황리에 행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안 읽는 책을 사 놓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출처 : X (@0Milleo)
출판사 ‘다산북스’ 부스에 붙어 있던 스티커의 내용이다. ‘Q. 안 읽는 책을 사놓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오답 : 지적 허영 / 정답 : 출판계의 빛과 소금’. 도서전에 방문해 책을 구매하는 이유가 단지 SNS에 ‘도서전에 간 나’ 혹은 ‘독서를 좋아하는 나’를 과시하기 위함인 사람들을 유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독서 인구가 감소한 상황에서 어떤 식의 관심이든 반갑다는 출판 업계의 자조 섞인 농담 같기도 하다. 일각에선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서 서점에 방문해 사진을 찍어가고, SNS에 업로드 하는 행위가 서울국제도서전까지 이어졌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전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독서 인구가 줄었음에도 도서전은 크게 성공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남들에게 독서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고, 과시하고 싶어 할까?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현상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 세계적인 모델이자 독서광으로 유명한 카이아 거버가 북클럽 운영과 관련하여 영국 매체 ‘가디언’과의 인터뷰에 남긴 말이다. 정말이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6명이 독서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최근 들어 독서는 정말 섹시한 것이 되었다. 남들은 하지 않는 것, 나만의 독특한 취미가 된 독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텍스트힙’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책과 글을 의미하는 ‘텍스트(text)’와 개성 있다는 의미의 ‘힙(hip)하다’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보통 ‘힙’이라는 단어는 유행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 반대편으로 갈 때 칭할 수 있다. 즉, 독서가 사람들에게 희소한 행위이기 때문에 힙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독서라는 희소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자기 과시적 욕구가 섞여 텍스트힙이라는 현상이 새로운 놀이로써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독서 커뮤니티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현상 초반, 사람들은 독서하는 취향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독서 공동체의 형성 과정이 역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독서라는 행위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이들은 실제로 책을 읽기보다는 독서하는 사람들에 속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책을 과시적으로 구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텍스트힙 현상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대중의 선택을 따르거나 개인의 취향을 숨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반면, 오늘날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화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에 맞춰 변화했으며, 대중의 기준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작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독서라는 활동이 더 이상 일부 ‘책벌레’들의 전유물이 아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책이 개성과 정체성을 반영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독립서점 ‘읽을마음’ 인스타그램 / 진주문고 페이스북
이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큰 인기를 끈 ‘개인 맞춤형 도서 큐레이션’ 부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각자의 성향과 외형을 명료하게 소개할 수 있는 MBTI나 퍼스널 컬러에 따른 책 추천이 큰 호응을 얻었다. 12지신 띠와 별자리 유형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부스에도 인파가 몰렸다. ‘종이 약국’이라는 부스에서는 책 처방을 컨셉으로 하여 고민 유형에 따라 책을 추천했다. 한 독립 서점 부스에서는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작가의 책인 ‘생일 책’을 큐레이션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을 출판사와 한국서점인 협의회가 도서전에서 내세운 것은, 독자들이 더 이상 도서를 그저 텍스트로만 보지 않고 자신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몰입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이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
도서전을 방문하는 목적은 사람별로 다양하다. 도서전을 하나의 축제로 인식해서, 팝업스토어를 ‘방문하듯 가볍게 다양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 ‘출판사에서 준비한 독특한 디자인의 굿즈를 갖기 위해서’, 혹은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서전이 독서 인구가 줄어든 현시점에 특히나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텍스트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과시적 소비가 다양한 문화예술 향유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지금까지 도서전과 독서 문화에서 나타나는 과시적 소비 현상을 알아보았다. 과시하기 위해 도서전을 방문하고 도서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타인과 나를 구분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적 취향’에 대한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한다. 독서가 하나의 문화적 취향이라면, 다른 문화예술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을까?
채현: 허영심으로 인한 과시적 소비가 독서 문화에만 나타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전시, 공연과 같은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어떤 소비 형태가 나타나고 있을지,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한나: 예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속 팝콘 논쟁을 들어 보셨나요? 해당 영화를 관람하고 온 네티즌이 ‘제발 이 영화를 볼 때 팝콘을 먹지 말아달라’는 후기를 남기며 ‘예술 영화’에 대한 논쟁이 화두로 떠오른 것인데요. 예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던 반면, 그저 ‘예술 영화를 보는 나’에 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어요.
저는 이번 서울 국제 도서전의 흥행을 보고 이 사례가 떠올랐어요. 실제로 현재 2030세대가 상업영화보다 비교적 대중적 인기가 덜한 예술 영화를 찾아보는 추세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와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흥행의 이유가 같은 맥락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문화 예술을 진정으로 즐기는 소비는 무엇일지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게 됐어요.
채현: 저는 미술 전시 관람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작년 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페터 바이벨 : 인지행위로서 예술’이라는 전시를 관람했어요. SNS에서 인기가 많았고, 제 주위 사람들이 전시를 보러 가니 저도 가야겠다 생각했었죠. 그런데 전시 내용이나 작품보다도, ‘작품 앞에 선 나’를 카메라에 담는 데에 더 몰입하던 관람객들이 인상 깊었어요.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꼭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진만을 남기러 온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왜 전시를 관람하러 오는가, 어떤 방식으로 관람해야 하나 한번 생각해 보게 됐어요.
출처 : ‘그라운드시소’ 홈페이지
성민: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재작년쯤, 우연히 ‘요시고 사진전’이라는 전시를 방문했어요. 당시 전시가 굉장히 인기가 많아서, 오랜 대기 끝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전시 초입부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의아했죠. 알고 보니, 사람들이 SNS에서 본 특정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초반 전시는 대체로 건너뛰었던 거예요. 전시는 각기 다른 의미를 줄 수 있지만, 그날 많은 사람들이 전시 자체보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온 것 같았어요. 이번 칼럼 주제를 생각하니 그때의 일이 떠오르네요.
채원: 뮤지컬, 연극과 같은 공연 예술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이번 겨울에 발레극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제 앞 사람들이 동영상만 찍고 떠들다가 공연이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서 공연장을 나갔어요. 아마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졌으니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요즘 뮤지컬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봐도 캐스팅 보드 앞에서 인증샷을 찍은 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이 필수 덕목이 된 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공연예술 통합전산망(KOPIS)의 ‘2022년 공연시장 동향 총결산 보고서’에 의하면 2022년 공연 티켓 판매액이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비해 43%나 증가했고, 그 팽창의 선두에 뮤지컬이 있었다고 해요. 저는 이 통계를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는데요. 표면상의 수요는 늘어났는데, 그 원인이 과시적 소비에 치중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뮤지컬이 다른 취미에 비해 고상해 보이고 가격대가 높은 취미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한 게 아닐까 하고요.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채현: 그렇다면, 앞서 살펴보았던 사례들처럼 과시적 소비로써 도서전을 방문하고, 전시회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는 게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일까요? 저희의 생각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한나: 과시적 소비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유가 어떻든 그런 소비들로 인해 다양한 문화예술이 더 활발해지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문화 예술이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가‘인 것 같아요. 비록 시작이 지적 허영, 과시적 소비였지만 결과적으로 본인의 취향을 찾은 사례도 있잖아요. 어쩌면 소비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몰라요. 타인의 취향을 무작정 따라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행을 무조건 피하는 것 역시 아니잖아요. 자신만의 취향을 찾고, 또 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는 스스로가 건강하고 즐거운 문화 예술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성민: 저도 과시적 소비가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과시를 목적으로 소비했지만, 이를 통해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 “예술 산업과 작가의 발전을 독려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과시적 소비가 예술 산업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더 많은 작품과 행사가 기획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예술의 본질은 내면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작품과 소통하며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예술 활동이죠. 문화 예술을 진정으로 향유하는 것이란, 내면을 탐구하고 이를 표현하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맥락에서 과시적 소비와 진정한 예술 향유의 경계는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겠죠.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가는 결국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순간이 아닐까요?
채현: 이 질문의 답을 ‘향유하다’의 사전적 의미인 ‘누리어 가지다’에서 비롯하여 생각해 보았어요. 결국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작품과 공명함으로써 내면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점에서 과시적 소비로써 독서하고,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한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허영심으로 인한 과시적 소비가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허영심이 동기가 되었더라도, 책이든 전시 관람이든 우선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언급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큰 화제가 된 스티커의 내용처럼, 어떤 관심에서 출발했든 업계 입장에선 소비자를 ‘빛과 소금’처럼 느끼니까요. 향유자 본인에게도 분명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설사 과시하기 위해 작품을 소비하기 시작했더라도, 막상 가까이하다 보면 예술에 애정이 가고, 꾸준하게 관심을 두게 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작품과 공명하며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라 믿어요.
채원: 동기가 어떻게 됐든 결과적으로 독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10명 중 6명이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독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현상이니까요. 오히려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남들과 구별되는 취향을 과시하려는 동기가 아니라, 그 마이너함도 획일화되는 것이에요. 가령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남들이 ‘마이너하다’고 여기는 취향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면, 역으로 진짜 자신의 개성을 잃게 되겠죠. 독서가 텍스트힙 현상이라는 과도기를 잘 보내고, 사람들이 책을 통해 진정한 나를 알게 되면 좋겠어요. 동기가 어떻든 마음껏 책을 읽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합시다!
Copyright 2024. Dear.A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해당 사이트에 게시된 작품 사진과 매거진의 저작권은 작품의 아티스트 및 매거진 에디터에게 있으며, 무단 복제 및 2차 가공을 금합니다.
editor. 강채현, 박성민, 윤채원, 장한나
proofread by. 이수빈, 김승현, 최한결
designer. 표수아
INTRO
지적 허영이 불어넣은 취향,
취향으로 향유하는 예술
예술의 ‘빛과 소금’이 될 당신,
당신 삶의 ‘빛과 소금’이 될 예술
w. 이수빈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의 흥행과 성인 독서율
출처: 서울국제도서전 홈페이지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2024)에 따르면 성인 독서율은 43.0%에 그친다. 즉, 성인 10명 중 6명은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국민독서실태조사가 처음 이뤄진 1994년 이래 역대 최저치다. 한편, 올해 6월 열린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는 15만 명이라는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 독서 인구가 감소한 상황에서 서울국제도서전의 흥행은 통념에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서울국제도서전은 어떻게 성황리에 행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안 읽는 책을 사 놓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출처 : X (@0Milleo)
출판사 ‘다산북스’ 부스에 붙어 있던 스티커의 내용이다. ‘Q. 안 읽는 책을 사놓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오답 : 지적 허영 / 정답 : 출판계의 빛과 소금’. 도서전에 방문해 책을 구매하는 이유가 단지 SNS에 ‘도서전에 간 나’ 혹은 ‘독서를 좋아하는 나’를 과시하기 위함인 사람들을 유쾌하게 지적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독서 인구가 감소한 상황에서 어떤 식의 관심이든 반갑다는 출판 업계의 자조 섞인 농담 같기도 하다. 일각에선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서 서점에 방문해 사진을 찍어가고, SNS에 업로드 하는 행위가 서울국제도서전까지 이어졌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전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독서 인구가 줄었음에도 도서전은 크게 성공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남들에게 독서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고, 과시하고 싶어 할까?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현상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 세계적인 모델이자 독서광으로 유명한 카이아 거버가 북클럽 운영과 관련하여 영국 매체 ‘가디언’과의 인터뷰에 남긴 말이다. 정말이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6명이 독서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최근 들어 독서는 정말 섹시한 것이 되었다. 남들은 하지 않는 것, 나만의 독특한 취미가 된 독서.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텍스트힙’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책과 글을 의미하는 ‘텍스트(text)’와 개성 있다는 의미의 ‘힙(hip)하다’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보통 ‘힙’이라는 단어는 유행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 반대편으로 갈 때 칭할 수 있다. 즉, 독서가 사람들에게 희소한 행위이기 때문에 힙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독서라는 희소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자기 과시적 욕구가 섞여 텍스트힙이라는 현상이 새로운 놀이로써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독서 커뮤니티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현상 초반, 사람들은 독서하는 취향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독서 공동체의 형성 과정이 역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독서라는 행위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이들은 실제로 책을 읽기보다는 독서하는 사람들에 속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책을 과시적으로 구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텍스트힙 현상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대중의 선택을 따르거나 개인의 취향을 숨기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반면, 오늘날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문화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에 맞춰 변화했으며, 대중의 기준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반영해 작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독서라는 활동이 더 이상 일부 ‘책벌레’들의 전유물이 아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책이 개성과 정체성을 반영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독립서점 ‘읽을마음’ 인스타그램 / 진주문고 페이스북
이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큰 인기를 끈 ‘개인 맞춤형 도서 큐레이션’ 부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각자의 성향과 외형을 명료하게 소개할 수 있는 MBTI나 퍼스널 컬러에 따른 책 추천이 큰 호응을 얻었다. 12지신 띠와 별자리 유형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부스에도 인파가 몰렸다. ‘종이 약국’이라는 부스에서는 책 처방을 컨셉으로 하여 고민 유형에 따라 책을 추천했다. 한 독립 서점 부스에서는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작가의 책인 ‘생일 책’을 큐레이션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을 출판사와 한국서점인 협의회가 도서전에서 내세운 것은, 독자들이 더 이상 도서를 그저 텍스트로만 보지 않고 자신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몰입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이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
도서전을 방문하는 목적은 사람별로 다양하다. 도서전을 하나의 축제로 인식해서, 팝업스토어를 ‘방문하듯 가볍게 다양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 ‘출판사에서 준비한 독특한 디자인의 굿즈를 갖기 위해서’, 혹은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서전이 독서 인구가 줄어든 현시점에 특히나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텍스트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과시적 소비가 다양한 문화예술 향유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지금까지 도서전과 독서 문화에서 나타나는 과시적 소비 현상을 알아보았다. 과시하기 위해 도서전을 방문하고 도서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타인과 나를 구분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적 취향’에 대한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한다. 독서가 하나의 문화적 취향이라면, 다른 문화예술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을까?
채현: 허영심으로 인한 과시적 소비가 독서 문화에만 나타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전시, 공연과 같은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어떤 소비 형태가 나타나고 있을지,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한나: 예술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속 팝콘 논쟁을 들어 보셨나요? 해당 영화를 관람하고 온 네티즌이 ‘제발 이 영화를 볼 때 팝콘을 먹지 말아달라’는 후기를 남기며 ‘예술 영화’에 대한 논쟁이 화두로 떠오른 것인데요. 예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던 반면, 그저 ‘예술 영화를 보는 나’에 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어요.
저는 이번 서울 국제 도서전의 흥행을 보고 이 사례가 떠올랐어요. 실제로 현재 2030세대가 상업영화보다 비교적 대중적 인기가 덜한 예술 영화를 찾아보는 추세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와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흥행의 이유가 같은 맥락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문화 예술을 진정으로 즐기는 소비는 무엇일지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게 됐어요.
채현: 저는 미술 전시 관람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작년 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페터 바이벨 : 인지행위로서 예술’이라는 전시를 관람했어요. SNS에서 인기가 많았고, 제 주위 사람들이 전시를 보러 가니 저도 가야겠다 생각했었죠. 그런데 전시 내용이나 작품보다도, ‘작품 앞에 선 나’를 카메라에 담는 데에 더 몰입하던 관람객들이 인상 깊었어요.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꼭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진만을 남기러 온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왜 전시를 관람하러 오는가, 어떤 방식으로 관람해야 하나 한번 생각해 보게 됐어요.
출처 : ‘그라운드시소’ 홈페이지
성민: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재작년쯤, 우연히 ‘요시고 사진전’이라는 전시를 방문했어요. 당시 전시가 굉장히 인기가 많아서, 오랜 대기 끝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전시 초입부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의아했죠. 알고 보니, 사람들이 SNS에서 본 특정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초반 전시는 대체로 건너뛰었던 거예요. 전시는 각기 다른 의미를 줄 수 있지만, 그날 많은 사람들이 전시 자체보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온 것 같았어요. 이번 칼럼 주제를 생각하니 그때의 일이 떠오르네요.
채원: 뮤지컬, 연극과 같은 공연 예술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이번 겨울에 발레극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제 앞 사람들이 동영상만 찍고 떠들다가 공연이 시작한 지 30분도 안 돼서 공연장을 나갔어요. 아마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졌으니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요즘 뮤지컬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봐도 캐스팅 보드 앞에서 인증샷을 찍은 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이 필수 덕목이 된 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공연예술 통합전산망(KOPIS)의 ‘2022년 공연시장 동향 총결산 보고서’에 의하면 2022년 공연 티켓 판매액이 팬데믹 이전인 2019년에 비해 43%나 증가했고, 그 팽창의 선두에 뮤지컬이 있었다고 해요. 저는 이 통계를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었는데요. 표면상의 수요는 늘어났는데, 그 원인이 과시적 소비에 치중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뮤지컬이 다른 취미에 비해 고상해 보이고 가격대가 높은 취미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한 게 아닐까 하고요.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채현: 그렇다면, 앞서 살펴보았던 사례들처럼 과시적 소비로써 도서전을 방문하고, 전시회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는 게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일까요? 저희의 생각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한나: 과시적 소비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유가 어떻든 그런 소비들로 인해 다양한 문화예술이 더 활발해지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문화 예술이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가‘인 것 같아요. 비록 시작이 지적 허영, 과시적 소비였지만 결과적으로 본인의 취향을 찾은 사례도 있잖아요. 어쩌면 소비의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몰라요. 타인의 취향을 무작정 따라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행을 무조건 피하는 것 역시 아니잖아요. 자신만의 취향을 찾고, 또 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과적으로는 스스로가 건강하고 즐거운 문화 예술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성민: 저도 과시적 소비가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과시를 목적으로 소비했지만, 이를 통해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 “예술 산업과 작가의 발전을 독려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과시적 소비가 예술 산업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더 많은 작품과 행사가 기획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예술의 본질은 내면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작품과 소통하며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예술 활동이죠. 문화 예술을 진정으로 향유하는 것이란, 내면을 탐구하고 이를 표현하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맥락에서 과시적 소비와 진정한 예술 향유의 경계는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겠죠.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가는 결국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순간이 아닐까요?
채현: 이 질문의 답을 ‘향유하다’의 사전적 의미인 ‘누리어 가지다’에서 비롯하여 생각해 보았어요. 결국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작품과 공명함으로써 내면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점에서 과시적 소비로써 독서하고,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한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허영심으로 인한 과시적 소비가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허영심이 동기가 되었더라도, 책이든 전시 관람이든 우선 예술에 대한 관심을 갖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앞서 언급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큰 화제가 된 스티커의 내용처럼, 어떤 관심에서 출발했든 업계 입장에선 소비자를 ‘빛과 소금’처럼 느끼니까요. 향유자 본인에게도 분명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설사 과시하기 위해 작품을 소비하기 시작했더라도, 막상 가까이하다 보면 예술에 애정이 가고, 꾸준하게 관심을 두게 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작품과 공명하며 진정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라 믿어요.
채원: 동기가 어떻게 됐든 결과적으로 독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10명 중 6명이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독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현상이니까요. 오히려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남들과 구별되는 취향을 과시하려는 동기가 아니라, 그 마이너함도 획일화되는 것이에요. 가령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남들이 ‘마이너하다’고 여기는 취향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면, 역으로 진짜 자신의 개성을 잃게 되겠죠. 독서가 텍스트힙 현상이라는 과도기를 잘 보내고, 사람들이 책을 통해 진정한 나를 알게 되면 좋겠어요. 동기가 어떻든 마음껏 책을 읽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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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강채현, 박성민, 윤채원, 장한나
proofread by. 이수빈, 김승현, 최한결
designer. 표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