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그저 피하고 싶은 종말
그러나 살기를 원하는 인간이기에
가장 필요한 존재: 역시 종말.
w.장서영
지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영화, 문학, 그리고 예술 전반에서 종말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왔습니다. 전염병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스티븐 킹의 ‘스탠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룬 드라마 ‘체르노빌’, 그리고 2000년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투모로우’를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종말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은 기후 위기, 대재앙, 전쟁 등으로 인한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아직 실제 종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대중을 매료시키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종말을 이렇게 자주 상상하고 묘사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인간은 변화와 불확실성에 직면할 때, 종말을 의식하고 생존을 대비하려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또한 현실의 불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찾고 근본적인 변화를 꿈꾸고자 종말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종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더 나아가 종말을 기대하는 경향마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종말에 매료되는가?
수민: 종말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죽음의 상황이에요. 인류의 대다수가 피해갈 수 없고, 운 좋게 목숨을 건져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이 세계의 많은 불행과 비참함은 철저하게 차별적이지만, 종말은 모두에게 완전히 평등해요. 특히 어떤 서사들은 실낱 같은 생존의 가능성이나 일말의 희망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모두가 일제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필사적으로 이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할 이유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수빈: 말씀해 주신 것처럼 사실 종말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상이한 듯합니다. 누군가는 종말의 도래를 부정하고 회피하지만, 누군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생존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종말의 혼란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하고...... 종말을 다루는 작품들만 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타나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종말은 비현실이 되기도, 극복 대상이 되기도, 기회가 되기도 하죠. 그렇기에 거대한 종말 앞에 놓인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종말을 해석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수민: 종말에 대한 반응에는 반드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선행되어야 해요. 우리는 어쩌면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종말을 다루는 작품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종말을 체험하며 죽음의 공포는 우리에게 구체화되고, 이는 악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죽음은 사신, 저승사자, 악마 등 실체가 있는 악으로 간주되기도 했죠. 특히 개인의 죽음이 아닌, 종 전체의 멸망은 우리에게 강렬하고 즉각적인 두려움과 거부감을 줍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내면 어떤 감정이 남을까요? 과연 종말은 악하기만 한 존재일까요?
#종말: 절대적 악에서 모호하고 중립적인 존재로
재형: ‘과연 ‘종말’은 인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알베르 카뮈의 책에서 인간과 세계의 간극을 ‘부조리’라 일컫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는 본성을 가졌으며, 감정을 갖고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세계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은 채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즉, 인간에게 종말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개인이 세계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실제 세계는 무관한 것이죠. 그러한 맥락에서 재난과 종말은 논리와 감정의 영역 밖에 있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무심한 재난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건설 현장의 개미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 같아요.
수민: 우리가 종말 앞에 힘없이 내던져진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세계의 부조리를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합니다. 문득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종말을 통해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기나긴 주마등을 겪는 것과 비슷합니다. 죽음을 직면하며 우리는 지난 삶의 궤적을 되짚습니다. 몇몇 철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실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의 소외된 인간이 죽음을 미리 바라봄으로써 현존재(dasein)로서의 본질을 회복한다고 주장했어요. 죽음은 단순히 삶을 부정하는 개념도,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이는 삶의 유한함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의미와 소중함을 곱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말 또한 우리를 파괴하러 온 순수악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종말을 본 우리의 경험들
지윤: 사실 저는 아포칼립스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관련 영화를 본 기억도, 소설을 읽은 기억도 거의 없어서, 종말에 대해 처음 느낀 감정은 ‘생소하다’였어요. 아포칼립스물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이 바로 개봉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설국열차’였어요. ‘설국열차’는 눈으로 뒤덮인 지구에서 생존자들이 한 대의 기차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죠.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여러분께서도 한번쯤은 보셨을 것 같은데, 저도 매우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영화가 단순히 기후 재앙 속에서의 생존을 위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극심한 ‘빈부격차’라는 현실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점이었어요. 영화 속 세계와 인간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꽁꽁 얼어붙은 지구는 고요히 존재하는 반면, 인간은 기차라는 하나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계급 투쟁을 벌이는데요. 이러한 대조는 작품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줬고, 나아가 ‘지구의 종말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인간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게 했습니다. 더불어, ‘나는 현실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존적 고민도 함께 떠올리게 되었죠. 비록 여전히 아포칼립스물이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설국열차’라는 작품을 통해 이 장르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출처: 구글 Google
수빈: 저는 기후 위기를 다룬 영화 ‘투모로우’를 인상깊게 보았는데요. 처음 감상했을 땐 종말에 대한 막연한 공포만을 느꼈다면, 스터디를 통해 영화 내용을 곱씹으니 문득 종말이 있기에 우리가 실존을 더욱 분명히 할 기회를 얻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후 위기설은 매번 화두에 오르지만, 많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지 않고 그 문제를 미래 세대에게 미뤄두는 실정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종말이 현 세대엔 닥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 없죠. ‘투모로우’를 보면 그 누구도 종말이 겨누는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실감하게 돼요.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종말의 형태가 구체화되고,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말의 불가피성이 여실히 드러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인간의 합리적 사고나 감정으로는 종말에 대응할 수 없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고, 오롯이 운명 앞에 놓인 개인의 실존만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듯이, 종말의 논의가 우리의 실존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부에 와닿는 종말을 이야기하는 ‘투모로우’가 어떤 아포칼립스물보다도 기억에 남네요.
출처: 구글 Google
지민: 저는 팬데믹을 다룬 한국 영화 ‘감기’가 떠올랐어요. 이 영화는 코로나19가 심각했던 2020년에 재조명되었죠. 역병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중지된 것,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생존 본능과 두려움이 실제 팬데믹 상황과 매우 유사해서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샀습니다. 만약 제가 이 작품을 코로나 이전에 보았다면 판타지로 느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속 인물들은 통제할 수 없는 재난 앞에 무력함을 느끼며 부조리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일상에 흔히 찾아오는 감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변모하고,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데요.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는 2020년에 현실로 나타났죠. 이 작품은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의 이기적인 인간의 반응을 현실적으로 잘 담아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가장 필요한 친구, 종말
재형: ‘우리는 종말을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로 치부하고 말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말은, ‘악’은 아니지만 하나의 어둠이라고 할 순 있을 것 같아요. 어둠, 즉 규명하기 어려운 것에 인간은 항상 두려움을 느끼죠. 그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항상 어둠을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망쳐왔습니다. 어둠이 초래할 혼돈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말이죠.
그러나 저는 “in sterquiliniis invenitur”라는 연금술 용어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직역하면 “오물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뜻이에요. 보지 않고자 하는 곳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모순 같아도 깊이 생각해 본다면 과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칼 융이 ‘인간은 악의 뿌리를 깊게 탐구해야 한다’고 제시한 적 있듯, 오히려 인간은 그 어둠을 계속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충분히,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에게 종말은 불가피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그 존재야말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닐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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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왕수민, 이지윤, 이지민, 황재형, 이수빈
proofread. 장서영, 한다현, 이수빈
designer. 김민지
INTRO
그저 피하고 싶은 종말
그러나 살기를 원하는 인간이기에
가장 필요한 존재: 역시 종말.
w.장서영
지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영화, 문학, 그리고 예술 전반에서 종말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왔습니다. 전염병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스티븐 킹의 ‘스탠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룬 드라마 ‘체르노빌’, 그리고 2000년대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투모로우’를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종말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은 기후 위기, 대재앙, 전쟁 등으로 인한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아직 실제 종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대중을 매료시키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한 종말을 이렇게 자주 상상하고 묘사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인간은 변화와 불확실성에 직면할 때, 종말을 의식하고 생존을 대비하려는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또한 현실의 불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찾고 근본적인 변화를 꿈꾸고자 종말을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종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더 나아가 종말을 기대하는 경향마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종말에 매료되는가?
수민: 종말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죽음의 상황이에요. 인류의 대다수가 피해갈 수 없고, 운 좋게 목숨을 건져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이 세계의 많은 불행과 비참함은 철저하게 차별적이지만, 종말은 모두에게 완전히 평등해요. 특히 어떤 서사들은 실낱 같은 생존의 가능성이나 일말의 희망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모두가 일제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필사적으로 이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할 이유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수빈: 말씀해 주신 것처럼 사실 종말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상이한 듯합니다. 누군가는 종말의 도래를 부정하고 회피하지만, 누군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생존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종말의 혼란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하고...... 종말을 다루는 작품들만 봐도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타나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종말은 비현실이 되기도, 극복 대상이 되기도, 기회가 되기도 하죠. 그렇기에 거대한 종말 앞에 놓인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종말을 해석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수민: 종말에 대한 반응에는 반드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선행되어야 해요. 우리는 어쩌면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종말을 다루는 작품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종말을 체험하며 죽음의 공포는 우리에게 구체화되고, 이는 악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죽음은 사신, 저승사자, 악마 등 실체가 있는 악으로 간주되기도 했죠. 특히 개인의 죽음이 아닌, 종 전체의 멸망은 우리에게 강렬하고 즉각적인 두려움과 거부감을 줍니다. 하지만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내면 어떤 감정이 남을까요? 과연 종말은 악하기만 한 존재일까요?
#종말: 절대적 악에서 모호하고 중립적인 존재로
재형: ‘과연 ‘종말’은 인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알베르 카뮈의 책에서 인간과 세계의 간극을 ‘부조리’라 일컫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는 본성을 가졌으며, 감정을 갖고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세계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은 채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즉, 인간에게 종말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개인이 세계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실제 세계는 무관한 것이죠. 그러한 맥락에서 재난과 종말은 논리와 감정의 영역 밖에 있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무심한 재난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건설 현장의 개미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 같아요.
수민: 우리가 종말 앞에 힘없이 내던져진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세계의 부조리를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합니다. 문득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종말을 통해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기나긴 주마등을 겪는 것과 비슷합니다. 죽음을 직면하며 우리는 지난 삶의 궤적을 되짚습니다. 몇몇 철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실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의 소외된 인간이 죽음을 미리 바라봄으로써 현존재(dasein)로서의 본질을 회복한다고 주장했어요. 죽음은 단순히 삶을 부정하는 개념도,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사건도 아닙니다. 이는 삶의 유한함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의미와 소중함을 곱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말 또한 우리를 파괴하러 온 순수악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종말을 본 우리의 경험들
지윤: 사실 저는 아포칼립스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어요. 관련 영화를 본 기억도, 소설을 읽은 기억도 거의 없어서, 종말에 대해 처음 느낀 감정은 ‘생소하다’였어요. 아포칼립스물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이 바로 개봉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설국열차’였어요. ‘설국열차’는 눈으로 뒤덮인 지구에서 생존자들이 한 대의 기차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죠.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여러분께서도 한번쯤은 보셨을 것 같은데, 저도 매우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영화가 단순히 기후 재앙 속에서의 생존을 위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극심한 ‘빈부격차’라는 현실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점이었어요. 영화 속 세계와 인간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꽁꽁 얼어붙은 지구는 고요히 존재하는 반면, 인간은 기차라는 하나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계급 투쟁을 벌이는데요. 이러한 대조는 작품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들어줬고, 나아가 ‘지구의 종말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는 인간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게 했습니다. 더불어, ‘나는 현실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존적 고민도 함께 떠올리게 되었죠. 비록 여전히 아포칼립스물이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설국열차’라는 작품을 통해 이 장르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출처: 구글 Google
수빈: 저는 기후 위기를 다룬 영화 ‘투모로우’를 인상깊게 보았는데요. 처음 감상했을 땐 종말에 대한 막연한 공포만을 느꼈다면, 스터디를 통해 영화 내용을 곱씹으니 문득 종말이 있기에 우리가 실존을 더욱 분명히 할 기회를 얻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후 위기설은 매번 화두에 오르지만, 많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지 않고 그 문제를 미래 세대에게 미뤄두는 실정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종말이 현 세대엔 닥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 없죠. ‘투모로우’를 보면 그 누구도 종말이 겨누는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실감하게 돼요.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종말의 형태가 구체화되고,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말의 불가피성이 여실히 드러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인간의 합리적 사고나 감정으로는 종말에 대응할 수 없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고, 오롯이 운명 앞에 놓인 개인의 실존만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듯이, 종말의 논의가 우리의 실존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부에 와닿는 종말을 이야기하는 ‘투모로우’가 어떤 아포칼립스물보다도 기억에 남네요.
출처: 구글 Google
지민: 저는 팬데믹을 다룬 한국 영화 ‘감기’가 떠올랐어요. 이 영화는 코로나19가 심각했던 2020년에 재조명되었죠. 역병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중지된 것,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생존 본능과 두려움이 실제 팬데믹 상황과 매우 유사해서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샀습니다. 만약 제가 이 작품을 코로나 이전에 보았다면 판타지로 느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속 인물들은 통제할 수 없는 재난 앞에 무력함을 느끼며 부조리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일상에 흔히 찾아오는 감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변모하고,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데요.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는 2020년에 현실로 나타났죠. 이 작품은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의 이기적인 인간의 반응을 현실적으로 잘 담아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가장 필요한 친구, 종말
재형: ‘우리는 종말을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로 치부하고 말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말은, ‘악’은 아니지만 하나의 어둠이라고 할 순 있을 것 같아요. 어둠, 즉 규명하기 어려운 것에 인간은 항상 두려움을 느끼죠. 그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항상 어둠을 외면하고, 그로부터 도망쳐왔습니다. 어둠이 초래할 혼돈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 말이죠.
그러나 저는 “in sterquiliniis invenitur”라는 연금술 용어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는 직역하면 “오물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뜻이에요. 보지 않고자 하는 곳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모순 같아도 깊이 생각해 본다면 과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칼 융이 ‘인간은 악의 뿌리를 깊게 탐구해야 한다’고 제시한 적 있듯, 오히려 인간은 그 어둠을 계속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충분히,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간에게 종말은 불가피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그 존재야말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닐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Copyright 2024. Dear.A Magazine all rights reserved. 해당 사이트에 게시된 작품 사진과 매거진의 저작권은작품의 아티스트 및 매거진 에디터에게 있으며, 무단 복제 및 2차 가공을 금합니다.
editor. 왕수민, 이지윤, 이지민, 황재형, 이수빈
proofread. 장서영, 한다현, 이수빈
designer.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