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주는 낭만과 위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당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은 무엇인가요?
w. 정해원
#환상적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어떤 감정이 전제되는가? 혹자는 경이감이나 황홀감, 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감을 기반으로 “환상적”이라 발화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환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비현실과 연결 짓기 쉽다. 널리 쓰이는 환상의 사전적 정의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고, 이는 현실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비현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숨 막히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예술이 창조한 세계로 도피하곤 한다. 그 세계는 현실과 닮아 있을지라도 ‘창조된’ 허구의 세계인 만큼 비현실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비현실을 엿볼 수 있는 창구 중 하나로 예술을 주목할 수 있겠다. 아티스트들은 예술을 통해 독자적 환상을 보여 주며, 감상자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환상에 홀리기도 쉽다.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환상은 두렵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낭만’을 검색하면 환상이 유의어로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같은 맥락으로 예술의 환상성을 짚어 냄으로써 낭만까지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발견한 낭만을 품은 채 또 다른 일상을 살아갈 우리에게 힘을 줄 예술의 중요성을 새로운 측면에서 조명해 보자.
#예술 속 환상에 대하여
환상: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
수영 : 다들 살면서 “환상적이다”라고 느낀 순간이 한 번쯤 있으실 것 같아요. 특히 예술을 감상하며 환상을 접할 때 그렇죠. 현실과 비현실을 놓고 봤을 때, 비현실 혹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인 요소들을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평소 예술 속 환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도 궁금한데요.
혜원 : 저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현실에 없는 것 같은 느낌, 또는 현실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현실과 결부되어 아름답다고 느낄 때 “환상적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처음 이 주제를 듣게 되었을 때 바로 떠오른 것은 고등학생 시절 관람했던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전시였어요. 긴 시간 동안 관람하며 다양한 감정에 휩싸였지만, 그중 가장 크게 든 생각은 “환상적이다”였거든요.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시각적 요소들을 재배열한 작품도 있었고, 그것들의 형태를 일그러뜨린 작품도 있었어요. 이질적 느낌, 현실 세계인 듯 아닌 듯한 모호성, 그 지점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등을 총합해서 환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 가진 또 하나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은 : 저에게 있어서 ‘환상’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같은 존재예요. 어렸을 때, <알라딘>, <토토로>, <해리포터> 같은 영화들을 재미있게 봤어요.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도 종종 찾아보고 있고요. 그러다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그때와는 또 다르게 느껴져요.
예를 들어, 디즈니 영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초등학생 때 보고선 ‘정말 재미있게 봤다’라는 막연한 기억만 있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고 다시 보니 곰이 된 엄마가 자식을 지키려고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어요. 엄마의 사랑이 너무 잘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렇게 추억을 상기시켜 주고,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환상’은 저에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친구예요.
수영 : 오랜만에 듣는 영화들이네요. 저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나서 반가워요.
저는 전공 덕분에 ‘환상 문학’에서 환상적 요소를 자주 접하게 돼요. 환상 문학의 ‘환상’이 크게 부정적 환상과 긍정적 환상으로 나뉘는데,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부정적 환상은 고딕이나 공포 장르에 가깝다면, 긍정적 환상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리얼리즘적 성격이 강해요. 비현실이지만 현실의 일부를 반영해 또 다른 현실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고, 현실이 확장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죠.
혹시 전시 좋아하시나요? 지금 그라운드시소에서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유토피아>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거든요.
(출처: 그라운드시소 공식 인스타그램, <유토피아: 노웨어, 나우>, 2024)
얼마 전에 그 전시를 보고 왔어요.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인만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더라고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상이죠. 그래도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웃음) 저는 이렇게 예술 속 환상이 일종의 일탈, 비상구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진 : 개인적으로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라, 제가 생각하는 ‘환상’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거예요.
(출처 : 핀터레스트,<궁전>, <바비 12명의 춤추는 공주 이야기>, 2006)
아까 지은님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보셨다면 저는 아직도 20살에 <바비>를 봐요.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디즈니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예시를 하나 들어, <바비 12명의 춤추는 공주 이야기>를 보면 12명의 공주가 바닥에 그려진 꽃을 따라 춤을 추며 마법의 세계로 가게 돼요. 그곳에선 말하는 즉시 현실로 이루어지죠. “그저 마음껏 춤추고 싶어”라는 말을 현실로 만들어 줘요. 마치 <알라딘>처럼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내가 원한다고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그 소원은 아이, 성인 할 것 없이 모두의 소망이죠.
현실을 살아가며 저 혼자 그리는 환상이 정말 많거든요. 같은 맥락으로 MBTI의 N성향을 가진 분들이 하는 상상이 다 환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을 하며 살아가잖아요.
지은 : 와, 보여 주신 걸 보니 생각보다 아동 만화스럽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럼 진님에게 <바비>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고 계신 애니메이션인 건가요?
진 : 계속이라기보단 가끔 생각이 나요. 이따금 너무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나중에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제게 환상은 일상이지만 의외로 굉장히 복잡한 거예요. 앞서 예시를 들었던 <바비>를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인데, 디즈니처럼 바비에 음악과 이를 통한 표현은 무조건 함께해요. 하나의 환상을 만드려면 굉장히 많은 것들, 캐릭터만 봐도 악역과 조력자 등이 필요하죠. 단순히 하나의 환상적 요소는 우리가 원하는 환상에 도달하지 못해요. 그래서 복합적인 것 같아요.
#현실과 비현실이 맞닿는 지점
수영 : 정말 가지각색 예시가 나왔어요. 환상에 대한 인식을 넓혀 봤으니 한 발 더 나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언급해 주신 사례나 다른 사례를 예로 들었을 때, 환상의 비현실성이 현실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혜원 :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봤을 때 환상적이라고 느끼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낯선 것을 마주하면 환상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늘 접하는 동네 뒷산이나 공원에서는 “환상적이다”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그랜드 캐니언과 같이 거대한 자연물을 보고는 “환상적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죠. 꼭 일그러진 시공간이나 현실에 없는 것만 환상적인 것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던 것의 스케일이 커지더라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수영 : 생각해 보니 그렇죠. 일상을 살짝 이탈하게 되면 그때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지은 : 이것도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인데요. 2022년 여름, 이여름 작가의 전시 <아이스크림 속 인생>을 봤어요. 제목 그대로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의 순간들을 찾아서 아이스크림 속에 저장한 작품들을 볼 수 있어요. 사실 아이스크림은 시간이 지나면 녹잖아요. 그런데 작가는 삶의 다양한 순간들이 잊히지 않도록 영원히 녹지 않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담아냈어요. 저는 여기에서 ‘현실(인생)’과 ‘비현실(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이 공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출처: 비트리 갤러리, <아이스크림 속 인생>,
3. 아이스크림 속 인생-sweet marriage, 2022, Colored epoxy resin, human miniature, wood, 9.5cm×18.5cm×3cm (액자포함 33×36×4.5cm)
4. 아이스크림 속 인생, 2022, Colored epoxy resin, human miniature, wood, 6.5ⅹ17.5ⅹ2cm (액자포함 26ⅹ31ⅹ4.5cm)
5. 아이스크림 속 인생-sweet mate, 2022, Colored epoxy resin, human miniature, wood, 9.5cm×18.5cm×3cm (액자포함 33×36×4.5cm))
수영 : 아이스크림으로 표현한 환상이 독특하네요. 저는 유토피아의 연장선을 떠올려 봤어요. 유토피아를 뒤집어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디스토피아였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들이 꽤 많은데, 그렇다고 해도 그 전개를 통해 인식을 전복한 만큼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존재하지 않는, 즉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를 상상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지은 : 초반에 말씀해 주신 ‘일탈’이나 ‘비상구’ 측면과도 연결되나요?
수영 : 네, 맞아요. 저는 현실과 비현실이 맞닿는 지점에서 낭만이 탄생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낭만의 사전적 정의 중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라고 명시된 부분이 있어요. 살다 보면 때때로 이상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요? 지나치게 현실적인 것만 좇다 보면 염세주의로 이어지기 쉽잖아요. ‘안 될 것 같은데’보다는 ‘될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시너지를 낼 때도 있으니까요.
진 : 저는 생각할수록 환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정적 현실, 즉 비극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현실에 없기 때문에 신기한 것처럼, 비극이 있기 때문에 환상적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원을 들어주는 게 모두의 소망인 이유는 누구도 나의 소원을 대가 없이 환상적으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출처: 뚝섬미술관, <LOGOUT>, 2021, https://miverse.tistory.com/164 )
한번은 뚝섬미술관에서 주최한 <로그아웃>이라는 전시에 갔는데, 전시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두운 공간에 잎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앙상한 나무를 봤어요. 너무 환상적이었어요. 그 무렵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때였는데, 이 나무 자체가 주는 위안이 너무 큰 거예요. 무생물임에도 나와 비슷한 처지를 만났다는 느낌 자체가 다른 사람한테는 “그냥 나무가 있네.”였겠지만 저에게는 환상이었어요. “나랑 같은 감정을 느끼는 생명이 있구나.” 같은 느낌이요.
(출처: 뚝섬미술관, <여행 갈까요 2>, 2021, https://youthpress.net/xe/kypnews_article_science/631099 )
<여행 갈까요>라는 전시도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공항을 모티프로 하고 있었고, 티켓이 여권과 비행기 티켓 모양이었어요. 너무 좋았고 환상적이었는데 왜 환상적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사실 여행을 한 번도 못 가 본 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더라고요. 이걸 비극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20년 살면서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전시가 저한테 너무 특별했던 거예요.
수영 : 환상을 체감한 경험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현실적인 경험을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현실에서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사소하게 긍정적인 일만 생겨도 훨씬 낫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현실의 우리가 환상을 느끼는 과정을 보면 또 비현실과 현실이 맞닿네요. 생각해 보지 못한 측면이에요.
진 : 그렇죠? 더 적나라한 예시는 비극을 환상으로 전달하는 OTT인데요. 최근 유명한 <더 에이트 쇼>나 <오징어게임> 이런 거요. 설정 자체부터 비현실적이죠. 하지만 그 비극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얼마나 환상적이겠어요. 그곳에 선택받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거예요. 궁극적으로 부정적 현실과 비극이 전제가 되어야 환상이 만들어진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죠.
(출처: <더 에이트 쇼>, 2024)
#환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낭만: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
수영 : 앞서 언급했던 많은 예술 속 환상을 감상한다는 입장에서, 저희는 또 예술의 향유자이기도 하죠. 이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의의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혜원 : 환상이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요.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렇기에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만큼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호기심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환상을 구현해 내기 위해 소설,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여러 시도를 하고 있고, 이로 인해 긍정적 자극과 반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지은 : 저는 환상을 통해 희망과 자신감,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처럼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것들을 보면, 현실에는 없지만 ‘어쩌면 정말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주인공 단오는 만화 속 엑스트라라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잖아요. 이걸 보고 저도 단오처럼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위해 더 노력하게 됐어요. 그리고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획하고 제작하신 분들의 머릿속을 엿볼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보다 보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싶은 것들을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하고 시각화한 거잖아요.
수영 : 맞아요. 저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했어요. 우선 가장 큰 의의는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예술을 통해 환상을 엿보고 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때 새롭게 보이는 풍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상상은 현실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종종 낭만을 느끼고, 그 낭만을 기반으로 현실을 살아가며 위안을 느끼는 방식으로요. 환상적 세계를 창조한 아티스트도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창작물을 내놓은 건 아닐 테니까요.
진 : 저도 적어도 환상 또는 상상을 할 때만큼은 수영님이 말씀하신 대로 현실에서 벗어나게 돼요. 분명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이 있어요. 동시에 환상이 줄 수 있는 의의를 생각을 해 본다면, 의외로 부정적인 요소들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방법이라고도 생각해요. 환상을 통해서 사회적 문제와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지 않나요? 사회적 비판을 예술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인 거죠.
이를테면 역사 영화 같은 거요. 죄책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알게되죠. 세상에 아직 발조차 내밀지 못한 사건들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특히 환상이라는 요소를 가미해서 전달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사회적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술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잖아요. 예술이 그런 것들을 알리는 방향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큰 위안인 것 같아요.
#에디터들이 생각하는 환상과 낭만의 차이
진 : 낭만과 환상은 유의어로 볼 수 있지만, 저는 또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낭만은 생각보다 평범해요. 저에게는 그냥 새벽에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읽고 글 쓰는 게 낭만이에요. 이게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추구하는 낭만이 소박해서 그런지 환상과 전혀 다른 양상이에요.
지은 : 예전에는 ‘낭만=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아요.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것들뿐만 아니라 일상 또한 낭만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한강으로 피크닉을 가거나 며칠 동안 먹고 싶었던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드디어 먹게 되는, 정말 평범해 보이는 순간이라고 할지라도요!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 환상은 ‘비현실’, 낭만은 ‘현실과 비현실을 아우르는 것’이에요.
혜원 : 낭만과 환상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지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낭만은 환상보다는 현실에 더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때때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타인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낭만이 되고, 그 속에서 환상까지도 느끼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영 : 저는 낭만도 아까 언급했던 긍정적 환상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조금 전 예시로 피크닉을 말씀해 주셨는데, 일상에서 추구하는 낭만은 사실 반복되는 일과 중에는 누릴 수 없잖아요. 하다못해 새벽에 책을 읽는 것처럼 일과 외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요. 일정이 없는 주말 같은 여유가 있어야 또 원하는 낭만을 누릴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딱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아요.
#환상이 주는 낭만과 위안
글을 읽는 동안 예술을 통해 접한 ‘환상’이 하나라도 떠올랐는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경험이 현실에 녹아들진 않았나?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던 환상은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매개체가 되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술 속 환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대신, 환상이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짚어 내고 더 나은 현실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내일에 발을 딛는 형태로도 환상을 향유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가 품고 살 수 있는 낭만이 되고, 또 일상의 위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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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권혜원, 김진, 장수영, 홍지은
designer. 김진
환상이 주는 낭만과 위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당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은 무엇인가요?
w. 정해원
#환상적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어떤 감정이 전제되는가? 혹자는 경이감이나 황홀감, 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감을 기반으로 “환상적”이라 발화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환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비현실과 연결 짓기 쉽다. 널리 쓰이는 환상의 사전적 정의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고, 이는 현실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비현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숨 막히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예술이 창조한 세계로 도피하곤 한다. 그 세계는 현실과 닮아 있을지라도 ‘창조된’ 허구의 세계인 만큼 비현실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비현실을 엿볼 수 있는 창구 중 하나로 예술을 주목할 수 있겠다. 아티스트들은 예술을 통해 독자적 환상을 보여 주며, 감상자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환상에 홀리기도 쉽다.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환상은 두렵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낭만’을 검색하면 환상이 유의어로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같은 맥락으로 예술의 환상성을 짚어 냄으로써 낭만까지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발견한 낭만을 품은 채 또 다른 일상을 살아갈 우리에게 힘을 줄 예술의 중요성을 새로운 측면에서 조명해 보자.
#예술 속 환상에 대하여
수영 : 다들 살면서 “환상적이다”라고 느낀 순간이 한 번쯤 있으실 것 같아요. 특히 예술을 감상하며 환상을 접할 때 그렇죠. 현실과 비현실을 놓고 봤을 때, 비현실 혹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인 요소들을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평소 예술 속 환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도 궁금한데요.
혜원 : 저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현실에 없는 것 같은 느낌, 또는 현실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현실과 결부되어 아름답다고 느낄 때 “환상적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처음 이 주제를 듣게 되었을 때 바로 떠오른 것은 고등학생 시절 관람했던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전시였어요. 긴 시간 동안 관람하며 다양한 감정에 휩싸였지만, 그중 가장 크게 든 생각은 “환상적이다”였거든요.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시각적 요소들을 재배열한 작품도 있었고, 그것들의 형태를 일그러뜨린 작품도 있었어요. 이질적 느낌, 현실 세계인 듯 아닌 듯한 모호성, 그 지점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등을 총합해서 환상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 가진 또 하나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은 : 저에게 있어서 ‘환상’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같은 존재예요. 어렸을 때, <알라딘>, <토토로>, <해리포터> 같은 영화들을 재미있게 봤어요.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도 종종 찾아보고 있고요. 그러다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그때와는 또 다르게 느껴져요.
예를 들어, 디즈니 영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초등학생 때 보고선 ‘정말 재미있게 봤다’라는 막연한 기억만 있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고 다시 보니 곰이 된 엄마가 자식을 지키려고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어요. 엄마의 사랑이 너무 잘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렇게 추억을 상기시켜 주고,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환상’은 저에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친구예요.
수영 : 오랜만에 듣는 영화들이네요. 저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나서 반가워요.
저는 전공 덕분에 ‘환상 문학’에서 환상적 요소를 자주 접하게 돼요. 환상 문학의 ‘환상’이 크게 부정적 환상과 긍정적 환상으로 나뉘는데,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부정적 환상은 고딕이나 공포 장르에 가깝다면, 긍정적 환상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는 리얼리즘적 성격이 강해요. 비현실이지만 현실의 일부를 반영해 또 다른 현실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고, 현실이 확장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죠.
혹시 전시 좋아하시나요? 지금 그라운드시소에서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유토피아>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거든요.
(출처: 그라운드시소 공식 인스타그램, <유토피아: 노웨어, 나우>, 2024)
얼마 전에 그 전시를 보고 왔어요.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인만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며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더라고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상이죠. 그래도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웃음) 저는 이렇게 예술 속 환상이 일종의 일탈, 비상구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진 : 개인적으로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라, 제가 생각하는 ‘환상’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거예요.
(출처 : 핀터레스트,<궁전>, <바비 12명의 춤추는 공주 이야기>, 2006)
아까 지은님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보셨다면 저는 아직도 20살에 <바비>를 봐요.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디즈니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예시를 하나 들어, <바비 12명의 춤추는 공주 이야기>를 보면 12명의 공주가 바닥에 그려진 꽃을 따라 춤을 추며 마법의 세계로 가게 돼요. 그곳에선 말하는 즉시 현실로 이루어지죠. “그저 마음껏 춤추고 싶어”라는 말을 현실로 만들어 줘요. 마치 <알라딘>처럼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내가 원한다고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그 소원은 아이, 성인 할 것 없이 모두의 소망이죠.
현실을 살아가며 저 혼자 그리는 환상이 정말 많거든요. 같은 맥락으로 MBTI의 N성향을 가진 분들이 하는 상상이 다 환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을 하며 살아가잖아요.
지은 : 와, 보여 주신 걸 보니 생각보다 아동 만화스럽지도 않은 것 같아요. 그럼 진님에게 <바비>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고 계신 애니메이션인 건가요?
진 : 계속이라기보단 가끔 생각이 나요. 이따금 너무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나중에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제게 환상은 일상이지만 의외로 굉장히 복잡한 거예요. 앞서 예시를 들었던 <바비>를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인데, 디즈니처럼 바비에 음악과 이를 통한 표현은 무조건 함께해요. 하나의 환상을 만드려면 굉장히 많은 것들, 캐릭터만 봐도 악역과 조력자 등이 필요하죠. 단순히 하나의 환상적 요소는 우리가 원하는 환상에 도달하지 못해요. 그래서 복합적인 것 같아요.
#현실과 비현실이 맞닿는 지점
수영 : 정말 가지각색 예시가 나왔어요. 환상에 대한 인식을 넓혀 봤으니 한 발 더 나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언급해 주신 사례나 다른 사례를 예로 들었을 때, 환상의 비현실성이 현실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혜원 :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봤을 때 환상적이라고 느끼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낯선 것을 마주하면 환상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늘 접하는 동네 뒷산이나 공원에서는 “환상적이다”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그랜드 캐니언과 같이 거대한 자연물을 보고는 “환상적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죠. 꼭 일그러진 시공간이나 현실에 없는 것만 환상적인 것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던 것의 스케일이 커지더라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수영 : 생각해 보니 그렇죠. 일상을 살짝 이탈하게 되면 그때부터 환상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지은 : 이것도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인데요. 2022년 여름, 이여름 작가의 전시 <아이스크림 속 인생>을 봤어요. 제목 그대로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의 순간들을 찾아서 아이스크림 속에 저장한 작품들을 볼 수 있어요. 사실 아이스크림은 시간이 지나면 녹잖아요. 그런데 작가는 삶의 다양한 순간들이 잊히지 않도록 영원히 녹지 않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담아냈어요. 저는 여기에서 ‘현실(인생)’과 ‘비현실(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이 공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출처: 비트리 갤러리, <아이스크림 속 인생>,
3. 아이스크림 속 인생-sweet marriage, 2022, Colored epoxy resin, human miniature, wood, 9.5cm×18.5cm×3cm (액자포함 33×36×4.5cm)
4. 아이스크림 속 인생, 2022, Colored epoxy resin, human miniature, wood, 6.5ⅹ17.5ⅹ2cm (액자포함 26ⅹ31ⅹ4.5cm)
5. 아이스크림 속 인생-sweet mate, 2022, Colored epoxy resin, human miniature, wood, 9.5cm×18.5cm×3cm (액자포함 33×36×4.5cm))
수영 : 아이스크림으로 표현한 환상이 독특하네요. 저는 유토피아의 연장선을 떠올려 봤어요. 유토피아를 뒤집어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디스토피아였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들이 꽤 많은데, 그렇다고 해도 그 전개를 통해 인식을 전복한 만큼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존재하지 않는, 즉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를 상상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지은 : 초반에 말씀해 주신 ‘일탈’이나 ‘비상구’ 측면과도 연결되나요?
수영 : 네, 맞아요. 저는 현실과 비현실이 맞닿는 지점에서 낭만이 탄생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낭만의 사전적 정의 중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라고 명시된 부분이 있어요. 살다 보면 때때로 이상적인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요? 지나치게 현실적인 것만 좇다 보면 염세주의로 이어지기 쉽잖아요. ‘안 될 것 같은데’보다는 ‘될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시너지를 낼 때도 있으니까요.
진 : 저는 생각할수록 환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정적 현실, 즉 비극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어요. 현실에 없기 때문에 신기한 것처럼, 비극이 있기 때문에 환상적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소원을 들어주는 게 모두의 소망인 이유는 누구도 나의 소원을 대가 없이 환상적으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출처: 뚝섬미술관, <LOGOUT>, 2021, https://miverse.tistory.com/164 )
한번은 뚝섬미술관에서 주최한 <로그아웃>이라는 전시에 갔는데, 전시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두운 공간에 잎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앙상한 나무를 봤어요. 너무 환상적이었어요. 그 무렵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든 때였는데, 이 나무 자체가 주는 위안이 너무 큰 거예요. 무생물임에도 나와 비슷한 처지를 만났다는 느낌 자체가 다른 사람한테는 “그냥 나무가 있네.”였겠지만 저에게는 환상이었어요. “나랑 같은 감정을 느끼는 생명이 있구나.” 같은 느낌이요.
(출처: 뚝섬미술관, <여행 갈까요 2>, 2021, https://youthpress.net/xe/kypnews_article_science/631099 )
<여행 갈까요>라는 전시도요. 전체적인 분위기가 공항을 모티프로 하고 있었고, 티켓이 여권과 비행기 티켓 모양이었어요. 너무 좋았고 환상적이었는데 왜 환상적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사실 여행을 한 번도 못 가 본 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더라고요. 이걸 비극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20년 살면서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전시가 저한테 너무 특별했던 거예요.
수영 : 환상을 체감한 경험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현실적인 경험을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현실에서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사소하게 긍정적인 일만 생겨도 훨씬 낫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현실의 우리가 환상을 느끼는 과정을 보면 또 비현실과 현실이 맞닿네요. 생각해 보지 못한 측면이에요.
진 : 그렇죠? 더 적나라한 예시는 비극을 환상으로 전달하는 OTT인데요. 최근 유명한 <더 에이트 쇼>나 <오징어게임> 이런 거요. 설정 자체부터 비현실적이죠. 하지만 그 비극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얼마나 환상적이겠어요. 그곳에 선택받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거예요. 궁극적으로 부정적 현실과 비극이 전제가 되어야 환상이 만들어진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죠.
(출처: <더 에이트 쇼>, 2024)
#환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수영 : 앞서 언급했던 많은 예술 속 환상을 감상한다는 입장에서, 저희는 또 예술의 향유자이기도 하죠. 이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의의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혜원 : 환상이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요.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렇기에 명쾌하게 정의 내리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만큼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호기심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환상을 구현해 내기 위해 소설,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여러 시도를 하고 있고, 이로 인해 긍정적 자극과 반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지은 : 저는 환상을 통해 희망과 자신감,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처럼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것들을 보면, 현실에는 없지만 ‘어쩌면 정말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주인공 단오는 만화 속 엑스트라라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잖아요. 이걸 보고 저도 단오처럼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위해 더 노력하게 됐어요. 그리고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획하고 제작하신 분들의 머릿속을 엿볼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보다 보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싶은 것들을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하고 시각화한 거잖아요.
수영 : 맞아요. 저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했어요. 우선 가장 큰 의의는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예술을 통해 환상을 엿보고 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때 새롭게 보이는 풍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상상은 현실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종종 낭만을 느끼고, 그 낭만을 기반으로 현실을 살아가며 위안을 느끼는 방식으로요. 환상적 세계를 창조한 아티스트도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의도한 게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창작물을 내놓은 건 아닐 테니까요.
진 : 저도 적어도 환상 또는 상상을 할 때만큼은 수영님이 말씀하신 대로 현실에서 벗어나게 돼요. 분명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이 있어요. 동시에 환상이 줄 수 있는 의의를 생각을 해 본다면, 의외로 부정적인 요소들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방법이라고도 생각해요. 환상을 통해서 사회적 문제와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지 않나요? 사회적 비판을 예술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인 거죠.
이를테면 역사 영화 같은 거요. 죄책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알게되죠. 세상에 아직 발조차 내밀지 못한 사건들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특히 환상이라는 요소를 가미해서 전달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사회적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술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는 거잖아요. 예술이 그런 것들을 알리는 방향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큰 위안인 것 같아요.
#에디터들이 생각하는 환상과 낭만의 차이
진 : 낭만과 환상은 유의어로 볼 수 있지만, 저는 또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낭만은 생각보다 평범해요. 저에게는 그냥 새벽에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읽고 글 쓰는 게 낭만이에요. 이게 환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추구하는 낭만이 소박해서 그런지 환상과 전혀 다른 양상이에요.
지은 : 예전에는 ‘낭만=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아요.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것들뿐만 아니라 일상 또한 낭만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한강으로 피크닉을 가거나 며칠 동안 먹고 싶었던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드디어 먹게 되는, 정말 평범해 보이는 순간이라고 할지라도요!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 환상은 ‘비현실’, 낭만은 ‘현실과 비현실을 아우르는 것’이에요.
혜원 : 낭만과 환상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지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낭만은 환상보다는 현실에 더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때때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타인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낭만이 되고, 그 속에서 환상까지도 느끼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수영 : 저는 낭만도 아까 언급했던 긍정적 환상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조금 전 예시로 피크닉을 말씀해 주셨는데, 일상에서 추구하는 낭만은 사실 반복되는 일과 중에는 누릴 수 없잖아요. 하다못해 새벽에 책을 읽는 것처럼 일과 외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요. 일정이 없는 주말 같은 여유가 있어야 또 원하는 낭만을 누릴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딱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아요.
#환상이 주는 낭만과 위안
글을 읽는 동안 예술을 통해 접한 ‘환상’이 하나라도 떠올랐는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경험이 현실에 녹아들진 않았나?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던 환상은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매개체가 되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술 속 환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대신, 환상이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짚어 내고 더 나은 현실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내일에 발을 딛는 형태로도 환상을 향유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가 품고 살 수 있는 낭만이 되고, 또 일상의 위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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